|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조각난 얼굴이 발그레하다. 삼각·사각의 면면이 붙어 이룬 곡선의 얼굴이 친근하고 따뜻해 보인다. 굳이 성별을 따질 건 없지만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바닥을 응시한 자태를 보자니,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형상이 잡힌다. 그래, 친구라도 하자고 해보자. 그런데 이 ‘긴 머리 여인 형상’은 그럴 의사가 없나 보다. 다가설수록 ‘정색’을 한다. 얼굴빛을 바꿔 버리는 거다. 붉게 달아올랐던 낯빛이 어느새 불 꺼진 창문처럼 검게 변해버렸다. ‘셔터가 내려온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잘못한 것도 없이 미안한 마음에 뒷걸음질을 치자 그제야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돈다.
저만치 멀뚱히 선 ‘긴 머리 여인 형상’과의 말 없는 대치국면에 속계산이 바빠지는 여기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이다. 특별기획전 ‘나 자신의 노래’를 열고 있다. 전시는 타이틀 그대로 ‘나’를 주제로 삼는다.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방식에 대한 얘기다.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지난한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시작점으로 ‘내가 뭘 할 수 있는가’를 거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다다른다.
어찌 보면 바로 오늘의 얘기일 수도 있다. 코로나가 몰고 온 ‘팬데믹시대’에 세상은 ‘너’도 ‘그’도 떼어버린 ‘나’만 보라고 하니까. 떨어져야 살아남는단다. 견디는 것도 각자의 몫이고 해결책도 각자의 짐이 돼 버렸다. 몸만 떨어지는 것뿐인가. 정체성·생각·마음·정신까지 다잡으라고 한다. 과연 과거 우리 삶에서 ‘멀어지다’를 덕목으로 삼은 적이 있던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한결같은 모토였을 텐데. 이 절체절명의 테마를 시각적으로 내보이기 위해 국내외 중진·중견작가 13명이 나섰다. 고상우, 배찬효, 원성원, 프랑수아 브뤼넬, 박은하, 이샛별, 지요상, 김나리, 김시하, 김현주, 이이남, 조세민, 한승구 등이 회화·사진·조각·영상·설치 등 130여점을 걸고 세웠다.
|
그렇다고 어느 작가도, 어느 작품도 ‘답’을 말하진 않는다. 그저 자신들을 던져놓고 침묵할 뿐이다. 전시를 기획한 강재현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나에 대해 더 생각하고 나에게 더 침잠하는 시간을 녹여냈다”고 말한다. “예전 세상에는 나와 너 둘뿐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내가 너무 많아지지 않았나. 다매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멀티 페르소나’라고 할까. 그러던 차에 덜컥 코로나사태가 터진 거다. 타인과 분리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비로소 나를 들여다볼 기회를 얻은 셈이다.”
△국내 대표 중진작가들이 꺼내놓은 130색 ‘자아’
내 얘기지만 결국 상대의 얘기고 우리의 얘기다. ‘나’를 거쳐 ‘너’를 떠올리고 ‘그와 함께’로 자연스럽게 확대해가니까. 큰 얼굴과의 조우가 강렬했던 ‘긴 머리 여인 형상’으로 돌아가 보자. 이 작품은 한승구 작가가 거울과 가면을 결합해 만든 ‘미러 마스크’(거울가면·2020)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나를 드러내고 감추는 방식을, 센서를 박은 인터랙션 장치로 만들었는데. 다가가면 본래 모습을 숨기고 상대를 비추는 거울로 변해버리는 작품은 누군가의 시선에 따라 스스로 은폐하고 가면을 쓰는 인간의 속성을 꿰뚫었다.
|
유일하게 해외서 출품한 캐나다 프랑수아 브뤼넬 작가의 ‘난 보이는 대로가 아니다 프로젝트’(Project I’m Not a Look-alike·2004)는 세상에 혹시 존재할지 모르는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난 여정 끝에 나왔다. 작가는 지난 20여년간 피 한방을 섞이지 않았지만 쌍둥이처럼 닮은 외모를 가진 이들을 찾아내 사진촬영을 해왔다. 20여점 사진 속 그들은 말 그대로 ‘도플갱어’인 듯하다. 하지만 나와 나란히 선 저이는 내가 아닌 누군가일 뿐. 작가는 외형이 비슷하다고 같은 사람은 아니며,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정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놓는다.
사진으로 내 존재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식으론 배찬효 작가의 ‘복장으로 존재’(Existing in Costume·2007∼2012)가 있다. 작가는 서양의 복장과 분장을 갖춘 자신을 모델로 세워 이른바 ‘서양군주초상화’ 연작을 냈다. 엘리자베스 1세, 헨리 8세 등 실존인물은 물론 호박마차를 타는 ‘신데렐라’ 등. 그 배경에는 서양에서 동양남자로 느낀 소외와 편견에 대한 저항이 있다는데. 남자와 여자, 권력자와 사회적 약자의 구분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 건가를 ‘근엄하게’ 드러내 보인 거다.
|
‘나’란 존재를 그저 인간관계에 가두지 않고, 우주적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시도도 보인다. 고상우 작가의 ‘검은 진주’(Black Pearl·2020) 연작이다. 마땅히 책임이 따른다. 우주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이 함께 사는 곳이니까. 털 한 가닥까지 그려 사진으로 촬영해낸, 흑진주 사슴 한 쌍을 전시장에 건 작가는 그렇게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말한다. 새와 꽃과 나비를 머리와 뿔에 비장하게 얹은 사슴으로.
이외에도 지요상 작가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치 남 대하듯 들여다보고 찔러보기도 하고(‘적요: 물 위의 무위 3’·2020), 김나리 작가는 40여점의 인물·동물상(‘먼 곳으로 2’·2018∼2020)에 상대의 아픔·눈물을 이해하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얹어놓기도 했다.
|
△바이러스에 점령당한 세상이 바라는 희망
전시 타이틀인 ‘나 자신의 노래’는 19세기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1819∼1892)의 시에서 따왔단다. 시집 ‘풀잎’(1882)에 실은 52편의 연작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다. 어찌 보면 지금의 ‘팬데믹시대’가 바라는 희망일 수도 있다. 남을 이해하는 것으로 내 정체성을 다질 수 있고, 종내는 화해와 통합, 공존과 상생까지 시도할 수 있다는 철학이 깔렸다고 하니.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함께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거다.
처음 5월에 준비했던 전시다. 팬데믹을 거치며 한 달씩 미뤄 가까스로 개막했다. 그 과정에서 해외작가 일정이 대거 취소되기도 했단다. 어렵게 열었지만 급격히 확산한 코로나의 위력에 미술관은 한산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전시에선 윤이 난다.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거침없이 내보이는 작품이 한 점 한 점 빛을 내고 있다. 국·공립미술관이 재휴관한 탓에 몇 남지 않은 미술관 전시가 됐다. 거대한 공간에서 적막하게 ‘어쨌든 나’에 푹 빠져보는 예상치 못한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놓치면 아깝다. 전시는 9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