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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박물관]①“절박감이 만든 ‘국민맥주’”…박문덕, ‘하이트’ 신화 쓰다

강신우 기자I 2018.09.27 05:45:00

박문덕 회장, 사장 취임 2년여 만에 ‘하이트 맥주’ 탄생
“실패하면 끝”, 여관서 1년간 합숙하며 연구·개발
‘천연수’ 광고 마케팅에 철저한 가정용 중심 유통
출시 3년 만에 1위 올라, 시장점유율 53% 찍기도
전세계 60여 개 국가에 수출하는 ‘글로벌 맥주’

하이트진로 맥주 역사 (그래픽=이동훈 기자)
[이데일리 강신우 기자] “첫 달에 12만 상자가 나가더군요. 그땐 정말 날마다 불안에 떨었습니다. 다행히 다음 달에 30만 상자, 그다음 달에는 공급이 달리더군요. 만들면 팔렸으니까요. 정말 그렇게 잘 팔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사진=하이트진로)
박경복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 박문덕(68) 하이트진로 회장은 1993년 5월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1991년 3월 조선맥주주식회사(현 하이트진로)에 사장으로 취임한 박 회장은 본격적인 2세 경영체제로 돌입한 지 불과 2년여 만에 맥주 신제품 ‘하이트’를 내놨다. 하이트 맥주가 회사의 운명을 바꿔놓을 정도의 ‘돌풍’을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당시 박 회장의 말처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만년 2위’의 설움 ‘하이트’로 씻다

창립 94년을 맞은 하이트진로의 역사는 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대일본맥주주식회사가 그해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에 국내 최초의 맥주회사인 ‘조선맥주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하이트진로의 시초다.

조선맥주주식회사의 대표 브랜드는 크라운맥주. 동양맥주(현 OB맥주)의 ‘오리엔탈 브루어리(OB)’ 맥주와 양사 체제였지만 OB맥주의 시장 점유율이 압도적이었다. 크라운맥주의 점유율은 20% 안팎, 임직원들은 ‘만년 2등’에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1962년 생산한 크라운 맥주.(사진=하이트진로)
‘왜 안 팔리는가?’ 박 회장의 궁금증은 증폭됐다. 치열한 마케팅을 주 무기로 삼아야 하는 주류회사였지만 홍보팀도 마케팅 부서도 없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맥주 테스트부터 해봐야 했다. 그렇게 슈퍼마켓 한 곳을 통째로 빌려 시음회를 열었다.

크라운 맥주 대(對) OB맥주. 브랜드를 떼고 시음한 결과 각각의 선호도는 5대5. 그러나 상표를 붙이자 결과는 달랐다. 1대9 참패.

“여기서 실패하면 끝이다.” 절박감이 조선맥주를 휘감았다. 1992년 5월 처음으로 마케팅 부서를 신설하고 ‘마지막 작품’이라는 각오로 신제품 출시에 들어갔다. 비밀 프로젝트였지만 경쟁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개발팀은 ‘암흑’ 그 자체였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회사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여관 한 채를 통째로 빌려 1년간 합숙하며 연구 개발에 몰두했다.

크라운 맥주 직매점.(사진=하이트진로)
1993년 5월1일, 그날이 왔다. 신제품 ‘하이트’가 세상에 빛을 보던 날이었다. 마케팅 콘셉트는 ‘암반 천연수’, 물이었다. 말단 직원의 아이디어였다.

1993년 출시한 하이트 맥주.(사진=하이트진로)
‘하이트, 이런 맥주를 맛보았는가?’ ‘100% 천연수로 만든 정말 순수한 맥주입니다’, 이 광고 문구는 통했다. 1993년 출시 3년 만에 맥주시장 1위에 올랐다. 유통 채널의 취약점 해결이 신제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보고 1차 거래에서는 유통 채널을 확장하기 위해 전담 인력을 투입했고 2차 거래에서는 소매점 위주로 전담 인력을 지원했다.

또 유흥용 출고를 지양하고 철저하게 가정용 중심으로 유통했다. 당시 가정용 시장 점유율이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하이트 맥주 표지 광고.(사진=하이트진로)
차별화한 마케팅과 유통채널 취약점을 해결한 조선맥주회사는 31.3%에 불과했던 하이트맥주의 시장 점유율을 1996년 41.7%, 2000년에는 54%까지 끌어올렸다. 출시 7년 만에 처음으로 절반을 넘겼다. 2002년 100억병을 첫 돌파한 이후 2007년 200억병, 2014년에는 300억병을 팔아 치웠다. ‘만년 2위’의 설움을 딛고 일어선 쾌거다.

하이트맥주가 대히트를 치면서 1998년 사명도 바꿨다. 1933년 창립 당시부터 사용해오던 조선맥주주식회사라는 상호 대신에 하이트맥주주식회사로 바꿨다. 2005년 8월에는 국내 최대 소주업체인 진로를 인수, 하이트-진로그룹으로 새롭게 출범해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종합주류전문기업으로 재탄생했다.

하이트 맥주 100억병 판매 기념 행사.(사진=하이트진로)
◇IMF로 영등포 공장 매각 후 ‘진로’ 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하이트맥주는 또 한 번의 위기를 겪게 된다. 지금까지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출시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하이트맥주는 제한적인 공장생산능력 탓에 24시간을 가동해도 수요를 맞추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4000억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 규모의 홍천공장 건립을 추진했으나 공교롭게도 그때 IMF 환란이 불어닥쳤다.

1980년대 영등포 공장 전경.(사진=하이트진로)
대부분의 기업이 줄도산했으며, 이전까지 하이트와 돈독했던 금융권도 ‘워크아웃이나 구조조정을 택하라’는 등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이트가 위기 극복의 열쇠로 선택한 것은 자산 매각과 외자 유치였다. 국내 맥주역사를 대변하는 영등포공장을 헐값에 매각한 것도 이때였다. 하이트는 이러한 진통과 아픔을 딛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2001년 6월에 박문덕 당시 사장이 회장으로 취임해 경영권을 공식 승계한 후 하이트맥주에는 새로운 변화가 진행됐다. 가장 먼저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최고의 품질로 고객의 만족을 추구하는 창조적이고 신뢰받는 기업’을 발표하고 고객만족경영을 더욱 강화했다. 이후 창사 이래 처음으로 청담동에 본사 건물을 마련했다.

이와 같은 성장세를 바탕으로 하이트맥주는 2005년 7월 국내 1위 소주업체 ‘진로’를 인수, 국내 최대 종합 주류회사인 하이트진로로 출범하게 됐다.

◇60여개 국가에 수출…‘글로벌 맥주’로 발돋움

하이트진로의 품질경쟁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신규 진출국가의 주요 기업들과 제휴를 맺으며 현지 시장 진출을 확대해가고 있다. 2014년에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바르셀로 그룹과 제휴를 맺고 중미 맥주시장에 본격 진출했으며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에도 현지 유통업체와 손잡고 맥주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일본, 미국, 중국 등 세계 60여 개 국가에 소주와 맥주를 수출하고 있다.

홍콩 내 하이트진로 브랜드 전문매장인 ‘하이트진로펍’.(사진=하이트진로)
최근 각국에서 하이트의 성장세는 눈여겨 볼만하다. 먼저 홍콩 맥주시장에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하이트진로의 홍콩 내 맥주 판매량은 32만 상자(1상자=500㎖ x 20병)로 전년 대비 31% 성장했다. 올해 예상판매량은 41만 상자다. 2012년 6만 상자 대비 약 7배나 증가했다.

맥주의 본고장 유럽에서도 최근 한국 맥주 판매량이 급증하며 관심을 끌고 있다. 하이트진로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주요 국가에서 맥주 판매량 22만 상자를 기록, 전년 대비 60% 증가했다.

꾸준한 성장세로 최근 5년간 판매 규모가 2배나 늘었다. 특히 하이트진로 법인이 있는 러시아에서의 성장세가 주목된다. 러시아 주류 판매 허가를 취득한 2014년부터 러시아 전역에 교민시장을 넘어 현지인 시장에 진출하면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하이트와 함께 흑맥주 ‘스타우트’도 인기인 러시아에서는 지난해 17만 상자의 맥주를 판매했다. 이는 전년대비 93% 성장한 수치다.

하이트진로는 유럽 현지 유통망을 지속적으로 넓히고 시장 지배력을 강화해 맥주 본고장 유럽에서 고성장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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