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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와 '어륀지'(orange)

고규대 기자I 2012.11.20 08:57:32
[이데일리 스타in 고규대 기자]출근하는 아침, 문 너머로부터 낭랑한 소리를 듣는다. 영어 공부하는 한 초등학교 소녀의 목소리다. 한 권의 짧은 동화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어떤 때는 이솝우화이고, 어떤 때는 이름 모를 동화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지 발음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다. 참, 대단하다 싶다. 한편으론 아침마다 눈을 비비고 책상에 앉아 영어 책을 펴는 모습을 떠올리니 참, 대견하다 싶다.

영어를 떠올리면 요즘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자칭 ‘국제가수’ 싸이다. 지난 11일 독일에서 열린 MTV 유럽 뮤직 어워드에서 각국의 기자들과 영어로 기자회견을 했다. 이에 앞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미국 유학 시절 부모님 몰래 진로를 바꾸고 힘겨웠던 과정 등을 강연하기도 했다.

싸이가 전 세계적인 유행을 일으킨 ‘강남스타일’의 배경에는 그의 영어 실력도 한몫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북미 지역 팬들에게 자신을 알렸다. 내로라하는 스타들과 갖가지 토크쇼에 출연해 유머를 과시했다. 물론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말춤을 가르치며 ‘Dress Classy Dance Cheesy’ (옷은 고급스럽게, 춤은 저렴하게) 라는 말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리듬감 넘치는 이 말은 금세 싸이의 트레이드마크가 돼 삽시간에 팬들 사이에서 패러디가 됐다.

싸이의 성공을 보면서 영어 몰입 교육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거지는 모양이다. 몇몇 학부모는 세계 무대에 서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선 싸이처럼 영어가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한국어를 채 떼기도 전인 유치원에서 영어 발음을 배우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OO에 오면 싸이만큼 영어 한다’는 전단지도 만났다.

하지만 원어민에게는 4년 미국 유학을 마친 싸이의 영어 솜씨도 아직 부족한가 보다. 포브스는 최근의 한 기사에서 “싸이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최근 미국에서 진행된 싸이의 인터뷰를 보면 싸이가 영어를 말하는 데 있어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고 적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다. 오렌지(orange)에게 ‘어륀지’를 허할 줄 모르는 혀 짧은 한국 사람인 필자에게는 어려운 문제다. 하긴, “미국 사람들은 오렌지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했던 이도 정작 “때때로 적절한 단어를 찾는 데 애를 먹더라”는 평을 들었다.

외국 여행을 나가면 실상 영어를 제대로 쓸 일이 별로 없다. 공항 티케팅이나 호텔 체크인이나 아울렛 쇼핑을 하는 데 중학교 영어 실력이면 충분하다. 쓸데없이 발음을 굴리는 대신 묵음마저도 소리 내는 ‘정직한’ 영어가 오히려 쓸만할 때도 있다. 가끔 말이 안 통하면 만국공통어인 손짓 발짓을 동원하면 된다.

사람과의 만남은 발음이 문제가 아니라 소통이 문제다. 싸이의 성공은 영어보다 그의 음악, 유머, 감성 덕분이다. 좌중을 웃길 줄 아는 실력이면 싸이에게는 충분하다. 해외 활동을 염두에 두고 현지 언어를 배우는 후배 연예인들도 현지의 언어보다 현지인의 감성과 눈높이에 맞춰야 할 터다.

아침에 만난 소녀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싸이의 성공도, K팝의 성공도, 심지어 아이폰의 성공도 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 덕분이다. 영어 발음을 아침마다 배우는 열정과 시간을 감성을 키우는 데 쏟으면 어떨까. 영어는 국제기구에서 근무하지 않을 바에야 싸이처럼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도 영어 ‘발음킹’이 되고 싶다면 한때 SNS에서 유행한 법칙을 따라해보길 바란다. ‘Apple’(애아뽀으), ‘Banana’(브내아느어), ‘Tomato’(틈에이러), ‘Help’(해협), ‘Musical’(미유지클), ‘Notebook’(넛븤)… 혀 꼬이는 건, 책임 못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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