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4층. 집의 형태를 표시하기 위해 바닥에 테이프를 붙인 다락방에서 연습이 한창이었다. 연극과 현실이 겹쳐졌기 때문일까. "우리 나이에 누가 밥을 해 주냐. 알아서 때우는 거지"라는 대목에서 너나없이 웃는다. 《한 번만 더…》는 작가와 연출가가 70대이고, 배우 4명도 평균 60세다. 오는 2018년이면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 이상)로 접어들게 되는 한국에서 본격적인 의미의 '실버 연극'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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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다는 쓸쓸함
연극은 방송작가 나상일(권성덕), 명예퇴직한 은행 지점장 서우만(이인철), 배우 이영호(이호성) 등 친구들이 문상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의 대화나 독백을 들으면 우리 사회의 70대가 서 있는 비탈이 보인다. 빨리 출세하는 게 좋은 줄 알았던 우만은 명퇴 후 등산이나 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신세다. 상일은 방송 트렌드가 바뀌면서 잊혀졌다. 영호도 "PD들이 젊어져서 우리 같은 늙다리는 쓰려고도 안 한다"고 푸념한다.
노년은 길다. 상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지옥"이라고 말한다. "노인이 되면 망각이 다 잊게 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생생해진다"는 것이다. 무력감이 무대를 지배한다. 영호는 쓸쓸하게 말한다. "내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나이가 되었다. 죽음만이 저만치 모퉁이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장식이 없는 무대
장윤수의 시골집 마루가 그대로 장례식장이 된다. 무대는 간소하다. 영정과 향, 병풍과 술상이 있을 뿐이다. 배우들은 분장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다. 연극은 장윤수와 이혼한 전처 홍 여사(손봉숙)가 등장하고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새 물길을 낸다. 화장(火葬) 장면에서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홍 여사의 진혼무(안무 조흥동)가 펼쳐진다. 박윤초 명창의 구음(口音)도 곁들여진다. 연습할 때 영정이 들어갈 액자는 텅 비어 있었다. 연출가 임영웅은 웃으며 "내 사진을 쓸까도 생각 중"이라고 했다.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희곡 《출세기》 《남사당의 하늘》을 썼고 드라마 《수사반장》으로도 알려진 극작가 윤대성은 《한 번만 더…》의 주제에 대해 "점차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생각, 이 시대에 당면한 노년의 문제를 나와 친구들의 사례를 들어 고백적인 솔직함으로 접근한 작품"이라고 했다.
연극이 어둡기만 한 건 아니다.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기도 하고, 웃음도 터진다. 연극을 하기로 의기투합하는 엔딩은 삶의 의지의 상징이다. 임영웅은 "'노인 드라마' 같지만 핵심은 오래 산 사람들이 들려주는 지혜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산울림소극장 25주년 기념무대다.
▶23일부터 5월 2일까지 서울 산울림소극장.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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