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각화하는 사람 대본을 바탕으로 가사, 곡을 쓰는 사람, 의상을 만드는 사람이 있듯, 무대 디자이너는 대본에 실린 글을 시각화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대본을 이해하는가에 따라 그 표현도 달라지겠죠.
과거 흑백 텔레비전을 보고 만화 캐릭터를 스케치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고 선물도 해 주었는데 다른 사람이 나의 재능을 알아본다는 것도 좋았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니는 것보다 화실에 다니는 게 더 좋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미대 진학을 꿈꿔 산업디자인학과에 들어갔는데, 당시 초빙교수님이 KBS에서 무대디자인을 하셨던 분이셨어요. 방송국에서 TV 미술, 드라마 미술 현장을 자주 보고 무대 스케치, 재료 등에 대해 설명을 많이 들었습니다. 조명에 따라 무대의 모양과 빛이 달라 보이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학기말에 교수님께서 뜻이 있다면 좀 더 공부해 보라고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이걸 하면 굉장히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8년간 공부를 했습니다. 유학생활 동안 좁은 무대 안에 굉장히 많은 미술적, 기술적 요소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재미있었고, 이런 게 공부구나,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라는 걸 그때 느꼈어요.
무대 미술을 전공하면서 처음 들은 이야기가 <미스 사이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에서 그 작품이 가장 인기 있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헬기가 등장하는 등 무대가 굉장히 화려하더라고요. 나도 그런 무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뮤지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본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뮤지컬의 경우, 어느 극장에서 공연할 것인지 가장 먼저 확인합니다. 장면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야 하는데, 극장 시스템에 따라 장면 전환이 어떻게 가능한지 결정이 되니까요. 극장 환경과 작품의 장면을 잘 맞춰야 하는 것이 무대 디자이너의 가장 우선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엔 무대 구현을 현실적으로 할 것인지, 추상적으로 할 것인지 고민합니다. 첫 번째 시안을 제시할 때 "이 부분은 무대로 풀기엔 한계가 있어서 추상적으로 생각을 했다."고 먼저 제시합니다. 그 후 대본을 바탕으로 연출가와 함께 고민하며 조율합니다. 작업 과정에서 화를 내는 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열등감의 표현인 것 같고 화를 낼 경우 격양된 감정 때문에 머릿속에 짜 둔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평소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즉흥적 스케치 가능 요즘엔 컴퓨터, 태블릿PC 등으로 작업을 많이 하는데 저는 연필과 종이가 있다면 원하는 그림을 그려서 그 자리에서 보여줍니다. 디자인에 대한 판가름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한 장점이라 생각을 합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어떠한 이미지를 순간순간에 잘 담아낼 수 있지요.
기술적 문제에 갇히기도 장면 구현에 몰두하면서 언제나 기술적인 부분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장면이 움직여야 효율적일까를 생각하다 보니,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디자인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첫 전공이었던 산업디자인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요. 산업디자인은 재료나 환경 등을 먼저 선정하고 도면에 맞춰 시공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와 달리 무대 디자인은 무대에 올려질 그림을 먼저 생각한 후 기술적인 문제들을 조율해야 하는데, 첫 번째 장면의 어떤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다음 장면이 나오지 않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더욱 많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대 디자인은 현장 경험이 60%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진행 상황의 변수들을 잘 대응해야 합니다.
<헤드윅> 10년을 함께 한 작품이지요. 대본을 읽기 전에 영화 DVD를 받아 보았습니다. 독립영화이다 보니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구성이고 작가이자 배우이자 연출가인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토크쇼 형식이었잖아요. 너무나 난해했어요. 그래서 영화에 나온 곳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 생각했고 바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이 다녔던 곳들을 찾아 자료 조사를 하고 미국에서 절 지도해 주셨던 분들이나 테크니컬 디렉터들도 게이여서 그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눴지요. 함께 게이 바에 가게 되었는데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조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 게이 바에서 인상적이었던 게 화장실 사인이었습니다. 남녀 구분을 푸른색, 붉은색으로 해 두었더라고요. 그걸 바탕으로 <헤드윅> 무대 하수에는 붉은색, 상수에는 푸른색을 배치하고 이 둘이 합쳐지며 보라색이 되는 가운데를 헤드윅이 자리하는 곳으로 정했습니다. 헤드윅을 보라색으로 상징한 것이죠.
유니플렉스에서 한 <그리스>, 충무아트홀 리노베이션 후 <미녀는 괴로워>, 블루스퀘어 <조로> 등 유난히 극장 개관작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극장 환경 등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라 힘들기도 하지만 첫 작품에 맞게 장치들을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조로>의 경우 창을 뜯어내서 조로가 탈 수 있는 줄도 달아보는 등 극장 지원을 많이 받아 여러가지 시도를 해볼 수 있었습니다.

시간 엄수 무대 디자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프로덕션의 스케줄에 잘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1차 일정, 2차 일정을 서로 잘 지킨다면 모두가 보장된 작업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극장에 들어가서도 일정이 늦춰지는 변수가 많은데, 이런 것을 모두가 알다 보니 시간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무대는 다른 분야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무엇보다 약속한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성을 갖춘 극장 스태프 극장 스태프들이 정작 극장에 대해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관리자에 머무는 경우죠. 특히 10곳 중 9곳 정도는 극장 실측이 아닌 건축 도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장을 건축할 때와 모든 것을 갖췄을 때의 크기는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 도면과 실제 크기가 10cm 차이 나면 무대 장치들이 다 어그러지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극장 실측은 무대 디자이너가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측해 보면 제공된 도면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극장 관계자와 회의할 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면 그 부분을 모르고 있었거나, 차후 수정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분한 작업 시간 프로덕션 제작 기간이 길어지면 지출 비용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작업하고 싶은 건 모든 디자이너의 입장일 것입니다. 반면에 외국 라이선스 뮤지컬의 오리지널 팀이 들어왔을 때는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걸 보면 많이 안타깝죠. 무대 설치 기간도 3주 이상으로, 실질적으로 무대를 다 세워놓고 공연하듯이 리허설을 하니까요. 무대 디자이너 뿐 아니라 연출을 비롯한 제작진들의 대우도 외국 스태프들과 다른 경우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70세까지 작업할 것 무대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 70세까지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이 좋아서, 그리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고 잘 해왔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무대 미술 거장들도 현역으로 일을 오랜 시간 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지 않지만 그 많지 않은 사람 중에 한 명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해외 장기 공연 <점프>로 브로드웨이를, <브레이크 아웃>으로 웨스트엔드를 갔었고 <공주의 만찬>으로 중국 공연, <미녀는 괴로워>로 일본 공연도 해봤습니다. 내가 디자인한 공연을 가지고 해외 장기공연을 해 보는 것 역시 꿈 중에 하나입니다.
인내의 에너지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하고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해야 합니다. 무대 미술이 좋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고 그들이 이 작업이 쉬울 거라고 판단하는 것 같은데, 막상 경험에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느낄 겁니다. 또 에너지가 충만하면 가장 좋은데 그것은 곧 체력이며, 체력은 인내와 연결됩니다. 시간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내가 버텨내야지' 같은 인내입니다.
무대 디자이너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선 다른 분야보다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자마자 작업 요청을 받을 수 없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따뜻하거나 배부르지 못하고 그렇게 1, 2년이 지나면 어떤 한계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며 불안해 하다 보면 겉에서 봤던 화려했던 무대에 대한 애정이 빨리 식을 수 있지요. 무대 미술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기 때문에 상호 교류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렇게 인내하고 고뇌했던 것들이 훗날 분명히 꽃을 피운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이 후배들이 생각하는 기간보다 길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정리: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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