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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맞이는 겸재·단원의 발길 따라…

조선일보 기자I 2008.12.31 12:03:00

옛 그림 속 ''일출 명소''

[조선일보 제공] 우리의 옛 그림 책을 들여다 본 적이 있으신지. 풍경화에서 하늘에 둥그렇게 뜬 건 대부분 달이다. "해돋이 그린 그림은 왜 많이 안 그린 건가요"라는 질문에 간송미술관 최완수 학예연구실장은 "안 그린 게 아니라 못 그렸을 것"이라고 답했다. "새벽에 일어나 해돋이 보려면 굉장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올 한 해 달은 종종 봤지만 일출 보신 적은 거의 없으시죠. 정신력이 강하고 부지런했던 겸재 정선 정도가 해돋이를 즐겨 그렸죠."

정시 출근하기도 버거웠던 한 해를 돌아보면 해돋이 그림 좀 안 그렸다고 옛 화가들 탓하기 민망해진다. 그래도 한 해 첫날 하루쯤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했던 겸재와 시선을 겹쳐보며 한 해의 포부를 다져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

▲ 단원 김홍도‘낙산사’

겸재는 해돋이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서울의 기막힌 일출 풍경을 그린 그림 '목멱조돈(木覓朝暾·목멱산 아침 해·간송미술관 소장)'을 남겼다. 목멱산은 남산의 옛 이름으로 겸재는 영조 16년(1740년) 65세의 나이로 양천현령에 부임했고 이듬해 이 그림을 그렸다. 왼쪽 봉우리가 더 높게 보이는 지금의 강서구 쪽에서 바라본 남산과 그 옆으로 수줍은 듯 솟는 일출 풍경이 포근하다.

겸재의 시선은 강서구 가양동 궁산공원에 있는 소악루(小岳樓)와 가장 가깝다. 1700년대 당시 만들어져 당대 명사들이 즐겨 찾았던 한강변 정자 악양루(岳陽樓) 자리에 세운 이 정자에 오르면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강 건너 월드컵공원이 약 170년 사이 완전히 변해버린 서울의 '차림새'를 드러낸다. 궁산은 해발 약 76m 정도로 산이라기보단 언덕에 가깝지만 맑은 날이면 남산은 물론 북한산까지 보일 정도로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 겸재 정선 "목멱조돈"

5호선 마곡역·발산역에서 6642번 버스를 타고 '가양사거리·휴먼빌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려 '양천향교지' 표지를 따라 가면 궁산공원이다. 문의 강서구청 공원녹지과 (02)2600-6398.

2005년 화재로 무너진 후 복원 작업이 한창인 강원도 속초시 양양군 낙산사 일출은 겸재와 단원 김홍도의 작품 속에 비슷한 모습으로 각각 등장한다. 일출 그림이 드문데도 두 거장의 그림에 동시에 등장한다는 건 낙산사 일출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겸재의 그림 '낙산사(간송미술관 소장)'와 단원의 그림 '낙산사'를 본 양양군청 문화관광과 최대영씨는 "이런 각도는 비행기에서 봐야 가능할 듯하다"고 했다. 겸재와 단원의 시선이 머문 위치에 그만큼 높은 봉우리가 없다는 것이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은 "겸재는 낙산사와 동해 풍경을 상상 속 시선으로 그렸다"며 "단원 그림 속 각도가 비슷한 이유는 아마 단원이 겸재의 그림을 봤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 겸재 정선 "낙산사"
비행기를 타지 않는 한 그림과 똑같은 풍경을 감상할 수 없다고 아쉬워하며 겸재의 그림을 다시 봤더니 절 앞 바위에 모여 앉아 해돋이를 즐기는 선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바위는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때 앉아서 좌선했던 이화대(梨花臺)가 있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낙산사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이 자리엔 현재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한 정자 의상대가 자리 잡고 있다. 화가의 '눈높이'엔 못 미쳐도 그림 속 선비들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니 위안이 된다.

'이화는 벌써 지고, 접동새 슬피울 제/ 낙산동반(洛山東畔)으로, 의상대(義湘臺) 올라앉아/ 일출을 보리라, 밤중만 일어하니…천지간 장한 기별, 자세히도 할셔이고.' 송강 정철이 읊은 '관동별곡' 한 구절을 외워가면 '선비 해돋이 놀음'을 만끽할 수 있겠다.

낙산사는 1월 3일 오후 2시~4일 오후 1시 '해돋이 사찰체험 프로그램(3만원·선착순 30명)'을 진행한다. 양양터미널에서 속초행 시내버스를 타고 5분 정도 가면 '낙산사' 정류소다. 문의 낙산사 종무소 (033)672-2447·www.naksan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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