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민주화의 새로운 프레임, 여성차별과 남성권력

최은영 기자I 2019.03.29 05:00:00
[정재형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정준영 사건이 3년 만에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현 사회의 문제점을 들여다보게 한다.

첫째는 정준영이 스타이고 도둑촬영 피해 대상이 연예인 지망생 혹은 무명 연예인이라는 점에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에서 이미 나타난 권력형 갑질 행위이다. 둘째는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도구화 즉 남녀차별의 이슈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톡 방에서 여러 명이 도둑촬영 영상물을 올리고 감상했다는 것인데, 법적·사회적으로 올린 사람과 반복적으로 요구한 사람 모두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음란한 영상을 몰래 감상하는 행위인 관음주의(voyeurism)에 해당한다. 개인이 아닌 집단관음주의다.

학자들은 영화 관객의 속성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집단관음주의로 은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비유적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유적으로 볼 수 있는 영화라는 행위가 극장이라는 예술 공간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라는 일상공간에서 은밀하게 불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처럼 ‘영화와 같은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은 없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마치 환상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환상영화란 영어로 ‘판타지 필름(fantasy film)’을 번역한 것이다. 판타지는 현실이 아니라는 뜻인데 북한과 미국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현실이 아닌 판타지였을 것이다. 그처럼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현재 벌어지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정준영의 카톡 방에선 ‘우리 이거 영화야. 살인만 안 했지. 구속감’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버닝썬 사건의 용의자인 승리 사례는 회사를 차리기 위해 성 접대를 했고 그것을 권력기관이 은폐시켜 주었다고 수사 방향이 모아지고 있다. 이러한 권력과 비리의 유착관계는 ‘부당거래’, ‘내부자들’ 등 무수히 많은 영화들에서 묘사된 익숙한 스토리들이다. 영화는 도피하기 위한 오락이다. 세상이 골치 아프니 영화 속으로 도피해서 그 고통을 위로 받고자 하는 게 오락영화의 목적이다. 그런 일들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지현 검사는 이러한 사건들의 맥락을 민주화정권과 남성권력의 문제로 보며 통탄한다(3월 14일 국민일보). 나도 그에 동감한다. 버닝썬 게이트, 정준영 몰래카메라 사건 등을 어떤 프레임으로 봐야 할까. 현재 한국사회를 끌고 가는 정권은 분명 적폐청산과 민주화, 통일의 의제를 밀고 가는 정의로운 정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한 정책이 결실을 얻으려면 구태의연한 정책의지로만은 결코 어려울 것이다. 좀 더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여성문제가 한국사회 정치적 교착지대를 신선하게 건드리는 새로운 프레임이란 점을 잊고 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민주 대 반민주, 정의 대 적폐, 자주통일과 외세 등의 해묵은 과제가 아니다. 민주화세력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던 진정한 정치적 의제인 여성평등에 관한 엄정한 척결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서지현 검사는 입으로만 정의를 부르짖지 말고 일반 범죄의 측면에서라도 제대로 처벌해 달라고 촉구한다. 권력의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면 전 정권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번 사건들도 부패권력이 결국 누구와 결탁하는가를 보면 왜 그런 말이 맞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번 사건들, 잠시 묻혀 있던 장자연 사건, 곧 불거질 김학의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건 남성권력, 여성차별의 프레임 속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남성들의 권력에 여성들의 성상납 혹은 성전시가 결부되는 구조인 것이다. 남성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 강한 여성을 제외한 대다수 약자 여성이 희생되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는 대한민국이 속으로 썩어가고 민주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사건들을 통해 분명하게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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