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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세계경제)"통화전쟁", 상반기의 불안요인

박소연 기자I 2001.12.31 15:08:46
[edaily] 새해벽두를 맞아 주요 은행 및 증권사들이 내놓았던 환율 전망 보고서들이 휴지조각으로 돌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2002년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달러/엔 환율이 갑작스럽게 치솟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초 애널리스트들은 달러/엔 환율이 연내 120엔대 후반에서 조정국면을 맞고 우선 새해맞이 휴일을 넘긴 다음 내년에 거래가 재개될 때 다시금 사닥다리 타기를 시작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었다. 그리고 여름을 넘기면서 환율이 소폭 진정, 봄보다는 겨울에 엔화가치가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대체적이었다. 고이즈미 정부와 일본은행(BOJ)의 경기부양책과 꾸준한 유동성공급이 일본경제를 부양할 것이라는 기대도 엔화에 호재가 될 것으로 해석됐다. 11월 초만 해도 달러화가 지나치게 고평가 돼 있는 상태인데다 부시 행정부가 전대미문의 테러를 당한 상황에서 엔화가치 급락을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대세였다. 130엔 진입은 논외 밖이었다. 한 국내 선물회사는 불과 일주일 전 2002년 환율 전망 보고서에서 달러/엔 환율이 1분기에 128.08엔, 2분기에 130.42엔, 3분기에 132.00엔, 4분기에 134.00엔 선으로 점차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달러/엔은 해를 넘기기도 전에 심리적인 지지선인 130엔을 "우습게" 돌파했다. 이미 27일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38개월래 최고치인 132.00엔까지 올라섰다. 일본 정책 당국자들도 급격한 엔화 약세에 대해 그다지 제동을 걸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다. 경제회복으로 아시아 통화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도 이제는 쓸모가 없다. 일본 정책 당국자의 입김이 더 거세기 때문이다. ◆ 엔화 약세의 불씨를 던진 것은 누구 불씨는 12월 중반에 접어들며 피어오르기 시작했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 재무성 국제담당 차관이 17일 엔화가 지나치게 강세를 보였기 때문에 약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라면서 "엔화 약세가 바람직하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던 것. 게다가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 재정담당상은 17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BOJ가 통화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단행해야 한다고 말했고 일본 자민당 야마사키 의원은 BOJ에 외국채권 매입을 촉구했고 재무성의 무토 차관도 엔화 약세 지지를 시사하는 코멘트를 내놓았다. 또 20일 재무차관시절 외환시장에서 "미스터 엔"이라는 별명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교수는 한 TV프로에 출연해 "달러/엔 환율이 내년 여름 140~150엔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폭탄 전망을 했다. 그는 한 술 더 떠 일본 정책 당국자들이 160~170엔 수준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고 외환시장은 곧 요동치기 시작했다. 달러/엔은 21일 129엔을 가뿐하게 뛰어넘었고 주말을 넘기면서 외환시장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장에 달러/엔 130엔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 2005년, 205엔 110엔대 수준에서 2001년을 시작했던 달러/엔 환율은 몇 차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긴 했지만 27일 132엔대를 상향돌파했다. 98년 일본경제 버블붕괴 당시 수준인 140엔대는 아직 힘겹지만 이대로라면 135엔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일반론이다. 게다가 다소 황당한 전망까지 나와 눈길을 끈다. 도이체 방크의 한 애널리스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보고서를 내놓고 달러/엔 환율이 2005년에 "205엔"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 시장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일본 은행권이 여전히 취약한데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재정적자를 안고 있어 "일본경제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달러/엔이 내년 연말 140엔까지 올라설 것이고 장기전망으로 2005년까지 205엔에 진입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일본 정부와 BOJ가 디플레이션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부양을 위해 유동성을 추가로 공급하라는 국내외적인 비판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같은 요구에 순응할 경우 일본 정부와 BOJ는 재정정책 상으로는 긴축을, 통화 정책상으로는 팽창을 유도하게 된다. 시중에 통화량이 늘어나면 통화가치는 필연적으로 하락하기 마련. 때문에 이 역시 엔화에는 악재가 되는 셈이다. 도이체 방크 애널리스트가 205엔 전망의 이유로 드는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올해 들어 BOJ가 계속적인 양적 통화완화책을 취해왔기 때문에 민간에 유통되고 있는 통화와 민간은행의 예금액을 포함하는 본원통화 증가율은 1년새 15%에 달했다. 그러나 미국의 본원통화 증가율은 5%에 불과했다는 것. 그는 이같은 통화량의 갭이 향후 몇 년간 지속될 것이라면서 이 갭을 메우기 위해 달러/엔은 205엔까지 충분히 상승할 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또 그는 아직 헤지펀드들의 포지션 청산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경고했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증시에서 외국 투자자들은 12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무려 40억달러의 매도우위를 보였다. 이는 지난 1년래 최대폭이다. 사실 일본에 투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초저금리에 엔화 추가약세 전망.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내세우는 "성역없는 구조개혁" 약속을 굳게 믿지 않는 이상 일본시장을 고집할 이유는 별로 없는 상황이다. 일본 정책 당국자들은 아직 개인 투자자들이 1300조엔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 엔화 매도 움직임이 자산 매도로 이어져 경제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아직 일본 국채 수익률도 1.3% 수준에 머물러 큰 변동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재무성 관계자들의 “엔화 약세 용인” 구두개입에서 촉발된 엔화 약세에 이미 유럽 및 미국계 헤지펀들이 일조한 상태고 아직 크리스마스 연휴 이전에 청산되지 않은 물량이 상당한데도 엔화는 달러에 대해 3년래 최저치까지 떨어졌다. 때문에 그는 내년 초부터 헤지펀드들이 다시금 엔화 매도에 나설 여지가 있다고 경고했다. 2005년 205엔 전망이 터무니 없는 추론만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일본정부와 BOJ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은 "마지막 카드"는 바로 "엔화 약세를 통한 수출 부양책"인만큼 내년에 엔화가 다시 하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것이다. 이미 BOJ는 수차례 시장개입을 해왔음을 시인했었다. ◆ 안에서 밖에서 "엔화 약세 그만" 일본 내에서도 이같은 일본정부와 BOJ의 엔화약세 유도를 환영하는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경제단체연합회)은 26일 성명을 통해 "엔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일 기업들에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밝혔다. 다우존스 통신은 이와 관련, 일 재계의 최대 이익단체인 게이단렌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은 달러/엔 환율의 상승이 일 정부가 원하는 선에 근접해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외부 국가들의 저항도 상당하다. 아시아 각국이 수출에 있어 경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 엔화 약세가 유발되면 자국 통화 평가절하를 유도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정환율제를 고집하고 있는 중국이 위안화 평가절하에 나설 경우 가뜩이나 중국의 저가상품에 수출이 발목잡혀 있는 아시아 각국으로서는 더욱 골치가 아파지는 일이다. 이미 싱가포르 달러의 경우 11년 반만의 최저치까지 주저앉았고 원화 환율도 1330엔대를 돌파했다. 대만 중앙은행은 그간 암묵적으로 고수해 왔던 달러당 45대만달러라는 지지선이 붕괴되는 것을 허락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미 13일 "엔약세에 따른 제반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 데 이어 다음 날 "세계경제에 아주 안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목소리를 한 톤 높였고 달러/엔 환율이 130엔을 탐색하기 시작한 24일과 25일에는 "통화전쟁"을 경고하며 "주변국과 공조"할 것임을 언명했다. 재경부의 김용덕 국제업무정책관(대외차관보)도 26일 오전 일본 재무성 구로다 하루히코 차관과 전화접촉을 통해 엔화 약세에 대한 우리 정부의 우려감을 전달하고 "필요한 경우 주변국과 공동 대응하겠다"면서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도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다는 태세다. 24일 중국 관영신문인 인민일보는 엔화가치의 하락은 아시아 경제를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며 "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통화가치 하락으로 97년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움직임을 반영, 연일 엔약세 유도에 여념이 없던 일본 당국자들도 자제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조구치 젠베이 일본 재무성 국제금융국장은 26일 "외환시장의 변동폭이 지나치게 큰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일본의 펀더멘탈은 건전하다"는 개입성 코멘트를 시장에 내놨다. ◆ "전망"은 무모해..."계산기를 놓지 말 것"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주요국 통화 내년 수준을 전망하기란 여간 무모한 일이 아니다. 이제 환율은 펀더멘탈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엔화 약세 의지에 대체적으로 움직이는 양상이며 일본과 주요 수출시장에서 경합을 벌이고 있는 아시아 각국으로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엔화의 발자취를 좇을 수 밖에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카드는 이제 일본 정부와 BOJ가 쥐고 있다. 따라서 한시도 "계산기"를 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엔화 약세가 부정적 측면이 분명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체적으로 추가 약세 전망이 우세한 편이다. 대신경제연구소 조현상 연구원은 "일본정부가 원하는 달러/엔 수준은 최소한 135엔 이상"이라며 "가까운 시일안에 이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133~135엔 부근에서 한 번 조정을 받겠지만 그 후에도 반락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조 연구원은 "내년 상반기에도 달러/엔은 130엔대 이상을 유지할 것"이라며 "140엔도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펀더멘털을 이유로 원화환율이 이를 추종하지 않을 것으로 보긴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원화환율의 경우 벌써부터 1365원이 전고점을 논하긴 어렵고 추세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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