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9번 ‘합창’은 1824년 5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됐다. 내년이면 창작 200주년을 맞는 셈이다. 유네스코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자필 악보를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인류 음악사에 남긴 그 큰 영향력에 경의를 표했다.
합창 교향곡은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연말 단골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계절이나 시기에 합창을 연주하면 이상하게 들릴 정도다. 해마다 12월이면 펼쳐지는 합창 교향곡 연주 관행은 올 세밑에도 여전하다.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을 비롯해 여기저기 베토벤의 합창 무대가 예고되어 있다. 곡의 탄생지이자 교향악의 본바닥인 유럽 쪽에는 이런 송년 풍경은 없는 듯하다. 대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가 있다. 경쾌한 춤곡과 행진곡으로 흥이 넘치는 연주회다.
9번 교향곡의 합창 부분은 독일 시인이자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것이다. 실러가 과연 기쁨 속에서 이 시를 지었을까. 예술작품에서 환희를 구가한다는 것은 실은 눈앞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반증일 가능성이 많다. 시인이 원래 제목을 ‘자유의 송가’라 짓고자 했다는 뒷얘기를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군주제에 반대한 실러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반체제 인사였는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자유를 환희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 자신도 이 곡을 완성할 무렵에는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 장엄한 환희의 노래를 새해 벽두가 아닌 낡은 해의 끝자락에 연주하는 까닭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낡은 것이 극에 다다랐을 때 그 과거를 떠나보냄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것을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어제 떠올랐던 태양과 오늘 떠오를 태양이 다를 것 하나 없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바뀐 숫자와 더불어 늘 어떤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열리기를 꿈꾼다. 낡은 달력을 버리고 새 달력을 거는 일이 뭐 그리 환희에 찰 일은 아니더라도, 아무렴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는 착각이라도 좀 키워야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지구의 오늘이, 우리의 현재가 너무나 암담하게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불화가 끊이지 않고, 인권과 자유는 내팽개쳐졌다. 기후위기는 극명하게 위험지수를 높이고, 사회 양극화는 도처에서 지진처럼 경보음을 울린다. 인류의 미래인 아이들이 죽어가고, 수명만 길어진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 가는데 세계의 위정자들은 제 명분과 잇속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역사학자들은 2023년을 일종의 암흑시대로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실러가 ‘환희의 송가’에서 설파한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메시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오는 12월이다.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함께 부를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인공지능에 호소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지능과 다르지만 나름 놀라운 ‘다른’ 지능을 지닌 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시대가 더 앞당겨지는 동력이자 계기일 수도 있다.
인간지능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류의 마음 중 하나다. 오늘의 이 모든 징후는 인간지능의 오만과 독재가 근본 원인일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에 비추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에 더 천착할 수 있는 명상과 겸허와 연대의 시간이 필요하다. 실러가 읊은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 서로 껴안아라 만인이여”를 더불어 노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