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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텔레콤, 한 직장서 23명 자살…이유는?

조선일보 기자I 2009.09.21 09:42:00

노동권 침해에 耐性 약한 佛문화 탓?

[조선일보 제공] '새 업무에 적응할 수가 없어요….'

프랑스텔레콤 여직원 스테파니(32)는 지난 11일 아버지에게 이메일로 유서를 보내고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했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텔레콤에 취직한 그녀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지만 몇 년 전부터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직장 동료 60%가 해고되고 남은 직원들도 회사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수시로 업무가 바뀌는 '전환 배치'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 6월 스테파니도 9년간 근무했던 부서를 떠나 고객 서비스 파트로 직무가 변경됐다.

지난 9일에는 프랑스텔레콤 트루아 지부에서 49세 남자 엔지니어가 사무실에서 회의 도중 할복자살을 기도,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그 역시 낯선 부서로의 인사 발령을 받고 낙담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했다.

프랑스 최대 통신회사인 프랑스텔레콤에서 작년 3월 이후 무려 23건의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사회가 충격에 휩싸이고 연일 언론의 톱뉴스로 오르내리자 자비에 다르코스(Darcos) 노동장관이 회사 사장을 소환해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회사 측은 처음엔 프랑스인 평균 자살률(10만명당 26명 자살)과 비슷하며, 직장 스트레스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정부까지 개입하며 상황이 심각해지자 ▲심리치료사 상담을 위한 핫라인 설치 ▲전환 배치 중단 등의 긴급 대책을 내놓았다.

프랑스텔레콤 자살사태의 밑바닥에는 '기업 경영 환경'의 급변이라는 구조적인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공기업이었던 프랑스텔레콤은 만성적인 적자로 부도위기에 몰렸다가 2004년 정부로부터 90억 유로(약 16조원)의 구제금융을 받고 기사회생했다. 이후 민영화돼 군살을 빼기 위한 고강도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16만명의 종업원 중 6만명이 해고됐고, 7만명이 전환 배치됐다. 노조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직무가 20번이나 바뀐 직원도 있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23명이 자살한 데는 '문화적 요인'도 작용하는 것 같다. 프랑스에선 근로자들의 파워가 세, 경영상의 긴급한 이유라 해도 '해고'가 사실상 어렵다. 연초 기업의 집단 해고 움직임에 대해 프랑스 근로자들은 '경영자 감금'으로 저항했다. 근로자들의 경영자 감금은 비난을 받기보다 '오죽하면 저럴까'라며 동정을 얻었다. 영미식 자본주의 문화권의 근로자들은 '해고'에 익숙하지만, 프랑스인은 노동권 침해에 대한 내성(耐性)이 매우 약하다. 프랑스 언론이 이번 사태를 놓고 '인사(人事) 테러'라며 근로자 편을 드는 것도 이런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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