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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 속에서 글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을까. 독자들은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AI의 개입이 없는, 인간이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쓴 글. 이제 그런 글이 되레 특별한 가치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물론 과거에도 인간은 항상 ‘혼자’ 쓴 것이 아니었다. 편집자, 공동 저자, 참고 문헌 등 글쓰기란 본래 협업이고 반복이고 참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AI는 이 지점을 확실히 넘어섰다. AI는 단순히 보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점점 더 창작의 주체로 올라서고 있다. 문장을 만들고 논리를 세우고 감정을 모방하고 스타일을 흉내낸다. 독자 입장에서 이게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뱉어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인간순수창작본’이라는 인증이 필요한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진짜 사람이 쓴 글인지 뭐하러 구분해. 읽기 좋으면 됐지.” 맞는 말이다. 글의 가치가 반드시 창작 주체의 정체성에 달린 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의 ‘출처’에 민감하다. 누가, 왜, 어떤 맥락에서 썼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특히 문학이나 에세이 같은 감정과 사고의 집약물에서는 더 그렇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미 그런 인증 시대를 살고 있다. 유기농 채소에는 인증 마크가 붙고 공정무역 커피에는 산지와 유통 구조가 적혀 있다. 단순히 ‘먹을 수 있다’가 아니라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생산했는가’가 중요해진 것이다. 글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AI가 범람하는 시대엔 오히려 사람 냄새 나는 문장이 귀해질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출판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출판사는 저자의 글쓰기 과정에 대해 더 철저히 기록하고 증명하려 할 수도 있다. 어떤 책은 ‘AI 부분 기여율 30%’ 같은 수치를 밝히는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어떤 작가는 “나는 오직 내 손과 내 머리로만 글을 쓴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러면 독자들은 책을 고를 때 단순히 주제나 평점뿐 아니라 ‘창작 방식’을 기준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문학상이나 수필 공모전도 바뀔 것이다. ‘AI 사용 금지’ 조항이 생기고 그걸 입증하기 위한 증명 방식도 생길 수 있다. 실제로 일부 글쓰기 대회에서는 이미 AI 사용을 제한하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리포트나 논문에 대한 AI 감별 툴을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는 ‘AI 글쓰기 감식 프로그램’을 보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순수창작본’은 과연 더 낫고, 더 값진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AI와 인간의 협업으로 나온 결과물도 충분히 의미 있고 때로는 인간 혼자 쓴 글보다 더 정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선택의 문제다.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이 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위에 어떤 고민과 노동이 있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선택하는 것이 독자의 권리다.
‘인간순수창작본’은 그래서 어떤 고집이자 저항이며 동시에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려 할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결국 인간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 말이 다듬어지지 않았더라도, 다소 느리고 서툴렀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언젠가 서점 한쪽에 이런 코너가 생길지도 모로겠다. ‘인간의 말이 그리운 당신에게. 인간순수창작본 모음전’ 그 코너에서 우리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더 천천히, 더 진심으로 읽게 될 것이다. AI가 쉽게 쓴 글보다 인간이 어렵게 쓴 글을 더 사랑하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