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초강대국’ 미국이라도 해도, 외교 수장이 ‘외교적 결례’일 수 있는 다른 나라 정상과의 회담을 당일에서야 취소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행방에 온 세계의 시선이 꽂힌 이유다.
◇이란이냐 베네수엘라냐
모건 오타거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폼페이오 장관의 유럽순방을 동행 중인 기자단에 “유감스럽게도 긴급한 문제로 인해 베를린 회담 일정을 다시 잡아야 한다”고 했다. 다만, 구체적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와 관련, 미 CNN방송은 “폼페이오 장관은 ‘알려지지 않은 목적지’로 향했다”고 했다. 동행한 기자단에게도 행선지를 통보하지 않았으며, 향후 그 행선지를 떠날 때까지 ‘보도 유예’를 요청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CNN방송은 덧붙였다. 로이터통신은 미국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국제적인 안보문제”라고 썼다.
현재로선 한 나라 정상과의 약속까지 급히 파기할 정도라면 굉장히 긴급한 사유일 것으로만 추정된다.
일단 가장 가능성이 큰 행선지는 중동지역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급작스런 행선지 변경이 미국 국방부가 대(對)이란 메시지 발신 차원에서 중동지역 내 항공모함 전단과 폭격기 배치를 발표한 지 단 이틀 만에 이뤄졌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이란 핵위기가 4년 만에 재발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인 점도 이 같은 추측을 부추기고 있다. 이날 이란 국영 IRNA는 이란 외무부가 이란 핵합의 당사국 5개국 특사들에게 2015년 핵합의에 대한 ‘축소된 공언’을 통보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5월8일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지 1년 만에 이란도 핵합의에서 이탈을 공식화한 셈이다.
일각에선 ‘한 나라 두 대통령’ 사태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점친다.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 축출을 위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임시 대통령) 측의 군사 봉기 이후 베네수엘라 사태는 새 국면을 맞이한 상태다. 미국이 수차례에 걸쳐 ‘군사 개입’ 가능성을 열어 둔 곳이다. 만약 폼페이오 장관의 최종 행선지와 그 배경, 그리고 임무 등이 드러날 경우 국제정세는 다시 한 번 요동칠 것으로 관측된다.
|
폼페이오 장관의 이번 유럽순방은 순탄치 않았다. 가는 곳마다 다소 껄끄러운 마찰을 일으켰다. 북극 정책을 조율하는 다자 협의체인 북극이사회의 협정문 채택이 불발된 게 대표적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번 북극이사회 각료회의에서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은 채 회의장을 떠났다. 로이터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은 기후변화를 북극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컸다”고 전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번 회의에서 “북극은 세계 힘과 경쟁의 각축장이 됐다”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공격적인 행동을 견제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중국·러시아와 각을 세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만남이 불발된 독일 내부에선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일 야당인 자유민주당의 비잔 디르 사라이 대변인은 “폼페이오 장관이 마지막 순간에 베를린 방문을 취소한 건 현재의 미·독 간 관계가 파탄 난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독일 정부가 최우선 과제여야 할 현재의 외교 사안에서 충분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독일은 오랫동안 미국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었지만 현재 양국의 관계는 트럼프 행정부 이후 난민 문제, 러시아 가스관 계획, 자동차 관세 부과 등의 문제를 놓고 심하게 경색됐다”고 썼다.
다만, 폼페이오 장관의 행선지 변경 사태는 이날 하루짜리에 그칠 공산이 커 보인다.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핀란드·독일·영국·그린란드 등을 방문하는 유럽 순방 일정을 소화하던 중이던 폼페이오 장관은 내일(8일)부터 시작하는 테리사 메이 총리와의 회담 등 영국 일정에는 변화를 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통신은 영국 외무부 대변인을 인용해 폼페이오 장관의 영국 방문 일정은 유효하며 이후 그린란드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