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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업들이 수평적 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낳은 수많은 성공의 비결이 직원들의 창의성을 보장하는 수평적 조직문화 덕이라는 판단에서다. 직원의 창의성을 가로막는 ‘부장님’이 없는 회사를 호칭 파괴에서 시작하는 곳이 많다. ‘과장님, 부장님’ 대신 이름 뒤 ‘님’을 붙여 ‘00님’이라고 부르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다. ‘매니저’나 ‘프로’ 등으로 호칭을 통일하기도 한다.
대기업 중 가장 먼저 호칭을 파괴한 기업은 CJ그룹이다. 18년 전인 2000년에 이미 직함을 폐지했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CJ 는 회사내에 수평적 기업문화가 자리를 잡았다고 자평한다. CJ 임직원들은 회장도 ‘이재현님’이라고 부른다.
최근 CJ그룹이 방송, 음악, 영화 등 창의성이 중시되는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 성과를 올리는데는 CJ그룹 내에 수평적 조직문화가 한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CJ에 이어 적지 않은 기업들이 호칭파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를 비롯한 계열사들이 호칭제를 폐지했고, 올해는 SK그룹과 LG그룹이 호칭제 폐지에 동참했다.
단순히 ‘님’이나 ‘프로’를 붙이는 것만으로는 조직문화 변화가 어렵다며 새로운 호칭제를 시도하는 곳도 있다.
카카오는 설립 초기부터 아예 직원들 간에 영어이름을 썼다. 한국 이름에 님을 붙이는 것보다 영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수평적 조직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김범수 의장, 지미는 임지훈 전 대표의 사내 영어 이름이다. 임 전 대표의 바통을 이어 받은 여민수 대표는 메이슨, 조수용 대표는 션으로 불린다.
카카오 관계자는 “신입사원부터 대표까지 영어이름을 부르다 보니 상사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직원을 무례하게 대하는 일이 없다”며 “불필요한 절차가 사라지며 의사결정 속도도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같은 호칭문화 덕에 다른 기업에서 경력으로 입사한 직원들도 쉽게 조직의 문화를 이해하고 빠르게 동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최근 카카오로 이직한 한 직원은 “다른 회사였다면 내가 차장으로 이직했는지, 부장으로 이직했는지 신경 쓰고 직원들과 상하관계를 파악하느라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며 “그러나 카카오에 와서 영어이름을 쓰는 문화를 이해하고 나니 상하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반면 호칭·직급을 파괴했다가 이전 체계로 되돌아가는 기업도 적지 않다. 임직원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거래처 등 외부에서 불편을 호소한다는 이유에서다.
KT는 2009년부터 5년간 매니저 호칭을 사용했지만 2014년부터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급 등 기존 체제로 돌아갔다. 한화는 2012년부터, 대리부터 부장까지 ‘매니저’로 통칭하다 2015년 3월 종전 체계로 돌아갔다. 포스코도 매니저, 팀 리더 등으로 간소화해 부르던 호칭을 작년 2월 일반적 직급 체제로 환원했다.
전문가들은 권위적인 연공서열 중심의 기업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호칭 변화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봤다.
이상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호칭 하나 변한다고 (권위적인 기업문화가) 바뀌겠냐는 의견들도 적지 않지만, 진정한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선 제도와 형식의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며 “호칭변화는 연공서열로 뿌리깊어진 권위적 기업문화와 구조를 바꿀 신호탄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수평적 호칭이 정착하면 이후 연차와 상관없는 공정한 평가 제도, 사무실 구조 개편 등 후속적인 변화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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