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공보처(현 문화체육관광부)는 민간방송설립을 위한 신청을 받았다. 총 60개 법인 및 개인이 방송설립 신청을 했고 이 중 57건의 개별신청자 중 유 전 회장이 대표로 있던 ㈜세모도 이름을 올렸다. 유 전 회장이 지상파 방송 설립까지 꿈꿀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강유람선 사업을 통해 쌓은 세모의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해 12월 세모는 건강식품인 ‘스쿠알렌’을 개발해 자체 상표로 수출했고, 당시 공산권이던 중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탄탄한 기업으로 평가받던 세모의 대내외적 위상을 바탕으로 유 전 회장은 지상파 방송 오너가 되려고 한 것이다.
유 전 회장의 미디어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1년생인 유 전 회장은 30대 초반이던 1972년 미국 선교회가 운영하던 극동방송에서 부국장직을 맡게 된다. 1960년대 대구에서 열성적으로 전도활동을 벌인 것을 눈여겨 본 지인의 추천 덕분이었다. 극동방송에서 설교프로그램을 맡고 있던 고(故) 권신찬 목사는 젊은 유 전 회장을 각별하게 챙기며 함께 설교활동을 했고,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으며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이들의 설교 방식에 비난이 쏟아지면서 둘은 2년만인 1974년 추종자 10여명과 함께 극동방송을 떠나게 된다. 이후 고 권 목사와 유 전 회장은 속칭 ‘구원파’를 조직해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 이어 유 전 회장은 1976년 부도직전의 봉제공장인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해 이를 구심점으로 전도와 사업을 병행하며 세모를 급성장시켰다.
종교방송에서의 경험이 유 전 회장의 성공에 밑거름이 되면서 민간방송설립까지 신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87년 세상을 놀라게 한 집단변사사건인 ‘오대양사건’이 터지고 1991년 검찰의 수사가 유 전 회장에게로 좁혀오면서 결국 유 전 회장은 방송사 오너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방송사를 세우고자 했던 유 전 회장이 ‘아해’라는 가명의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수십억원을 들여 개인전시회를 연 것도 결코 우연한 취미생활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