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박철응 기자] "가계부채는 고소득층이 주로 부담하며 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가 적용돼 건전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당시 허경욱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국경제 설명회에서 강조한 말이다.
DTI 규제는 이렇듯 정부가 한국 경제의 체력을 설명하는 주된 키워드일 정도로 요긴한 정책 수단이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숱한 부동산 규제 완화책을 내놓으면서도 DTI의 틀은 유지해 왔다.
◇ 금융, 가계 건전성 위한 마지막 보루
DTI가 금융 건전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 불안을 잠재우는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었다.
지난해 봄부터 강남권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오르고 전세난이 심화되자 다급해진 정부가 꺼낸 카드도 DTI 규제 강화였다. 대상 지역은 수도권 전역으로, 기관은 제2금융권까지 확대한 것이다.
그런데 올 들어 부동산 거래가 끊기고 건설업계 위기가 심화되자 업계를 중심으로 DTI 완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정부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빚 내서 집 사라고 정부가 부추기느냐는 비판은 차치하고라도, 가계부채가 700조원에 달해 금융건전성에 적색등이 켜진 상황에서 DTI 완화는 위험한 일이었다.
정부가 DTI 유지라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틈새로 내놓은 것이 바로 `실수요자`를 위한 정책이다.
입주예정자의 기존 주택(6억원, 85㎡이하)을 매입할 경우에 한해 DTI 특례를 인정한 4.23대책이 그 산물이다. 하지만 적용 대상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정책효과가 없었다.
◇ 친서민 명분에 허수아비로 전락
추가 대책이 불가피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6월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실수요자 위주로 세심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며 "이사를 가고 싶어도 집이 팔리지 않아 불편을 겪거나 갑자기 전셋값이 올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의의 실수요자들을 살필 수 있도록 정책을 검토해 달라"고 말했다.
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DTI 완화와 관련 "상황이 변하면 환경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 영원불변한 법칙은 없다"고 언급해 DTI 제도에 손을 댈 것임을 시사했다.
당초 이번 부동산 대책은 4.23대책을 보완하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막상 발표된 내용은 4.23대책 보완 뿐 아니라 내년 3월까지 실수요자에 한해 금융기관이 자율적으로 DTI 적용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사실상 한시적인 DTI의 철폐 조치가 이뤄졌다.
지난달 정부가 보다 심층적인 효과 분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 차례 발표를 연기하는 혼란을 빚은 것도 DTI 완화의 수준을 놓고 부처 간 견해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부는 실수요자를 살린다는 명분을 들어 한시적으로 DTI를 허수아비로 만든 게 이번 대책의 골자다. 최근 강조하는 친서민 색깔을 강화하면서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대해 손 놓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DTI 유지라는 기조는 크게 흔들리게 됐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정부의 고민은 거듭된 규제 완화로 이미 부동산 대책으로 쓸 카드를 거의 다 소진했다는 데 있다. 남은 카드 중 핵심이 DTI 규제이다보니 가계부채 문제 등 위험요인을 안고도 완화책을 내놓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