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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17세기 코미디에 '갑질' 괴성…웃음 폭발 '스카팽'

장병호 기자I 2019.09.11 06:00:00

명동예술극장 올 하반기 첫 작품
佛 몰리에르 희곡 현대적 재해석
재벌 풍자 속 계급 전복 통쾌함
임도완 연출 "나중에도 웃을 수 있길"

국립극단 연극 ‘스카팽’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야 이 XXXX….”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 올해 하반기 첫 공연으로 올린 연극 ‘스카팽’의 한 장면. 극중 재벌로 설정된 아르강뜨(양서빈 분)가 무대 위에서 분노하는 순간 미리 녹음된 괴성이 극장 안에 울려 퍼진다.

괴성의 정체는 지난해 한국 사회의 ‘갑질’ 논란에 불을 지폈던 모 재벌가의 녹취 파일을 편집한 것. 심지어 작품 중간에는 ‘땅콩 회항’을 연상시키는 대사도 등장한다. 휴식 시간 없는 110분의 공연 시간 동안 극장 안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진중한 연극이 주로 올랐던 명동예술극장에서 정통 코미디 연극을 만나는 것은 2016년 ‘실수연발’ 이후 약 3년 만이다.

‘스카팽’은 프랑스 대표 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가 1671년 발표한 ‘스카팽의 간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 소장으로 한국 연극계에서 ‘신체극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임도완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국립극단 연극 ‘스카팽’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몰리에르는 비극만 예술로 평가받던 시대에 풍자와 해학을 내세운 희극을 선보였다. ‘스카팽의 간계’는 이탈리아 희극 양식인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익살스러운 하인 스카피노에서 유래한 캐릭터 스카팽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동극이다. 재벌가인 아르강뜨와 제롱뜨가 자식들의 정략결혼을 약속하고 여행을 떠난 사이 이를 알게 된 두 사람의 자식들이 제롱뜨의 하인 스카팽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17세기 희곡인 원작에 동시대적 감각을 입힌 점이 눈길을 끈다. 몰리에르의 유랑극단이 한국을 찾아 ‘스카팽’을 공연한다는 액자식 구성이 대표적이다. 막이 오르면 몰리에르가 가장 먼저 등장해 관객을 맞이한다. 하희탈을 연상케 하는, ‘코메디라 델라르테’의 소품 중 하나인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쓴 몰리에르는 등장해 속사포 같은 대사로 자신을 소개하며 시작부터 관객이 긴장을 풀게 만든다.

임도완 연출 특유의 몸놀림과 움직임도 이목을 사로잡는다. 아르강뜨와 제롱뜨(김한 분)는 팔자걸음으로 뒤뚱뒤뚱 걸으며 첫 등장한다. 허영심에 가득찬 부자의 모습을 비꼰 몸짓이다. 반면 스카팽(이중현 분)과 또 다른 하인 실베스트르(박경주 분)는 잽싼 몸놀림으로 무대 위를 자유롭게 오간다. 하인이 재벌보다 더 꾀 많고 영리함을 보여준다.

실제 유랑극단의 공연처럼 배우들은 마임과 탭댄스, 심지어 랩까지 하며 관객들의 흥을 돋운다. 무대 왼편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요찬 음악감독과 함께 직접 악기도 연주하며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국립극단 연극 ‘스카팽’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무엇보다도 ‘스카팽’의 미덕은 지금 시대 관객도 공감할 메시지다. 몰리에르가 21세기인 지금도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단순한 웃음을 넘어 인간 본성을 본질적으로 파헤침으로써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고 신랄한 풍자로 권위주의에 냉소를 던졌기 때문이다. ‘스카팽’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든 재벌들과 이들보다 우위에서 재벌들을 철처하게 놀리는 스카팽의 모습은 계급의 전복이라는 통쾌함을 전한다.

무겁지 않게 시작한 작품은 가볍지 않으면서도 유쾌하게 마무리된다. 웃고 나면 내용을 잊게 되는 통속적인 코미디와 달리 웃음 속에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임도완 연출은 “풍자라는 것은 보는 그 순간 즐거운 것이지만 작품을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걸 떠올리며 나중에도 웃을 수 있다”며 “내 작품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도완 연출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이중현·성원이 각각 스카팽·몰리에르 역으로 분한다. 양서빈·김한·박경주·이호철·임준식·박가령·강해진·박경주·이수미 등 8명의 국립극단 시즌 단원들도 출연한다.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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