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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총장은 소재·부품·장비 산업 분야에서도 우리나라가 지금까지처럼 기본적으로 국제무역의 비교우위 원칙에 따라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맹목적인 국산화 논리에 사로잡혀 정부 주도로 연구·개발(R&D)을 추진하기보다는 시장의 논리로 기업들에 해당 문제를 맡겨야 한다는 게 김 총장의 생각이다. 정부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응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목적으로 추가경정예산 등 관련 예산을 확보하고 R&D 제도도 대폭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상황에서 오히려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차분한 대응을 주문하고 나선 것이다.
김 총장은 “소재부품 분야는 첨단 기술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일본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관련 기술인재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비로소 관련 인재들 양성에 나섰기 때문에 당장 탈일본화를 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총장은 “우리도 과거에 비해 관련 분야에서 많은 기술을 확보했지만 가격 경쟁력과 시장의 크기를 고려해 봐야 한다”며 “가령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일본이 전 세계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 시장에 들어가서 일본과 경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진단했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지난달 4일 일본이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이유로 수출 규제에 나선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품목 중 하나다. 일본이 수출 규제 30여일 만인 지난 7일 삼성전자에 예외적으로 수출 허가를 내준 품목이기도 한 EUV 포토레지스트의 우리나라 대일 수입의존도는 91.9%에 달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또 다른 수출 규제 품목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서도 90%, 불화수소에서도 70%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는 당장 압도적인 점유율의 일본 기업들과 경쟁할 수 없는데다 그렇다고 국내 시장만 보고 해당 품목들을 생산하기에는 시장이 너무 작다는 게 김 총장의 견해다.
그러면서 김 총장은 기업에 최대한 자유를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총장은 “결국은 소재부품쪽 기술 확보는 기업이 할 일이고 기업이 알아서 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달 31일 열린 제1차 ‘일본 수출규제 대책 민·관·정 협의회’에서 “일본기술 추격에는 50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제한 뒤 “수출과 무역은 모두 기업간 거래”라며 “기업간 거래에 정부가 개입하는 건 가급적 최소화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김 총장의 주장은 박 회장의 이 같은 언급과 일맥상통한다.
김 총장은 대기업이 우리나라 중소기업 제품들을 사주지 않기 때문에 국산화가 어렵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은 전부 중소기업들이 소재부품 원천기술을 갖고 해당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기업보다 갑의 위치에 있다”며 “우리나라 중소기업도 제품만 우수하다면 대기업이 안 사줄 이유가 없다”고 언급했다.
다만 김 총장은 이번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처럼 정치적 상황 등 외부 변수에 따라 관련 기술이 무역무기화 될 수 있기 때문에 중장기적 호흡을 갖고 자체 R&D도 병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김 총장은 “이번 사태를 각성의 계기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라며 “단기간에 뭘 해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중장기적인 호흡을 갖고 단계적으로 국산화할 수 있는 것은 해나가면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