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의 신뢰 문제를 트집 잡아 비핵화 거부 입장을 밝힌 것은 유감이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그제 유엔총회 연설에서 “우리의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나 일방적 핵무장 해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 대한 신뢰 없이 국가 안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신뢰와 국가 안전을 들먹였지만 실은 비핵화를 원한다면 종전 선언부터 내놓으란 주문이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 중단, 핵실험장 폐기, 핵무기·기술 이전 자제 확약 등 ‘중대한 선의의 조치들’을 이행했으나 미국이 화답하지 않고 있다는 리 외무상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미 유엔총회 연설에서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 완화’란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앞으로 비핵화 협상 주도권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기 싸움이 한층 더 치열해질 것을 예고한 대목이다.
얼핏 들으면 리 외무상의 주장은 그럴듯하나 커다란 논리적 모순이 내포돼 있다. 그가 예시한 ‘중대 조치들’은 실질적 비핵화와 거리가 먼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턱없는 강변이다. 리 외무상이 “미국에 돌멩이 하나 날린 적이 없다”고 우겼지만 핵 강국을 자처하며 미국 본토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한 게 누군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자행된 군사 도발은 대부분 북한 소행이다. 누가 누굴 못 믿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상대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면 비핵화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란 주장은 더 황당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부의 어느 누구도 ‘실질적 비핵화 후 종전 선언’ 원칙을 번복한 적이 없다. 어떻게든 남북 관계를 개선해 보려는 우리의 노력을 교묘하게 비틀어 혈맹인 한국과 미국을 이간질하려는 야비한 속셈을 공공연히 드러내다니 어이없다.
북한으로선 이미 개발한 핵무기 목록을 제시하고 비핵화 일정을 밝히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이미 세계를 8번이나 속인 처지에 더는 잔머리 굴리지 말고 자신의 신뢰부터 입증하란 얘기다. 또다시 ‘행동 대 행동과 단계적 이행’ 운운하며 시간을 끌었다간 김정일 국무위원장의 실토대로 ‘감당할 수 없는 보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