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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 美 통상보복,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 '아웃리치'

이재운 기자I 2017.11.26 10:10:10

'전가의 보도' 된 TPEA 앞 논리적 대응 어려워
중국산 원재료 사용 두고 '가격 왜곡'으로 해석
현지 이해관계 일치하는 '우군' 확보 강화 필요
USTR 최종 공청회 앞두고 정부-업계 고심 거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기간 마지막날이던 지난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이재운 기자] ‘세탁기 세이프가드’를 계기로 미국의 통상 보복 현실화에 대한 대응 방안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우군 확보’다. 미국 현지에 우리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이들을 확대하고 규합해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아웃리치(Outreach)’라는 현지 접촉 행위를 통해 함께 다툴 수 있는 연합전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26일 재계와 정부에 따르면 우리 기업의 가전(세탁기)과 철강(유정용 강관) 제품에 대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높은 세율의 징벌적 관세 부과 권고안을 낸 가운데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최종 공청회를 앞두고 있다. ITC의 최종판정과 이 공청회 결과를 바탕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최종 제재 수위를 결정하게 된다.

◇보완책이던 TPEA, ‘전가의 보도’가 되다

미국은 지난 2015년 전임 행정 수반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자유무역협정인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와 이를 보완하는 TPEA(무역특혜연장법)라는 법적 장치를 나란히 마련했다. TPP로 인해 타격이 예상되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TPEA는 그러나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함께 어디에나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기 시작한다. TPP를 폐기하면서 TPEA는 오히려 강조하는 트럼프 정부의 기조에 따라 불균형이 발생하며 보호 무역주의가 강화된 것.

법무법인 광장의 주현수 변호사는 최근 열린 세미나에서 “2012년 세탁기 13.02%, 2014년 유정용 강관 15.75% 등 이전에는 이 정도 수준도 높다며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해 낮추는 경우가 많았는데, 트럼프 정부에서는 (30% 이상)높은 관세 부과가 늘어나면서 오히려 과거 세율은 ‘애교’ 수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기조 속에 부상한 개념이 AFA(Adverse Facts Available)이다. AFA는 제소자(미국 기업)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의미하는 개념인데, 이에 대한 입증 책임은 피소자인 해외 기업·정부에, 판단 권한은 자신들에게 두는 방식으로 적용된다. 세탁기 건의 경우를 보면 미국 가전 제조사 월풀이 피해를 주장하는 내용을 제기하면, 이에 대해 피소자인 삼성전자(005930)LG전자(066570)가 기한 내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해야 하고, 그런데 그 판단 권한은 철저히 미국 정부에 속하는 것.

문제는 과거와 달리 현 정권 들어 설문 문항을 기존 50여문항에서 갑자기 수 백개로 늘리고, 자료 제출 기한 연장도 과거와 달리 석연치 않게 거부하거나 연장해주더라도 불과 며칠만 해주는 식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여기에 조사 대상을 기존에는 피소 대상에 대해서만 했던데 반해 이제는 관련된 거래로 확대 적용하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 재계와 정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여기에 제출 기한에 임박해서 자료를 제출했다며 국내 기업들의 변압기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물린 사례도 역시 우려를 높이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여러모로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을 겨냥한 조치에 우리 기업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주 변호사는 “유정용 강관의 경우 미국 정부가 가격 왜곡이 발생하는 ‘특별한 시장 상황(PMS)’에 대한 규정을 여기에 적용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고 설명했다. 국내 철강 제조사들이 중국산 원자재를 사용해 강관 제품을 만들어 수출했는데, 중국산 원자재의 가격이 바로 정부에 의해 가격이 통제되는 ‘비(非)자본주의적 시장’에서 만들어졌고, 이것이 한국산 강관의 가격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논리다. 중국 기업을 겨냥한 조치에 우리 기업도 다치고 있는 것.

◇무기력한 WTO..‘아웃리치’ 통한 우군 확보 절실

현재 미국은 WTO에 대해서도 탈퇴를 운운하며 큰 소리칠만큼 독자노선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 해도 WTO 제소가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짙다. 이 때문에 관련 분야 단체나 전문가들은 현지에 우리 편을 만드는 아웃리치 활동의 강화에 주목하고 있다.

아웃리치는 보통 종교적인 측면에서 ‘선교활동’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대상지에 가서 직접 접촉하며 포교를 하는 행위다. 여기서 파생해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는데, 무역통상분야에서는 일치하는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설득해 우군으로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은 물론 현지 공관, 경제단체 등에서 현지 주요 관계자들과 계속 접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에는 한국무역협회 워싱턴지부가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로 불리는 오하이오,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3개 주를 돌며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관련 설명회를 진행했다.

아웃리치 활동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이번 세탁기 세이프가드 판정과 태양광 패널에 대한 반덤핑 관세 부과 판정이다. 세탁기 건은 120만대 물량을 기준으로 이를 넘는 제품에 대해 최대 50% 관세 부과 판정 결과가 나왔는데, 당초 월풀이 주장한 ‘전체 물량’ 대신 국내 업체가 주장한 145만대 기준에 더 근접하게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각각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 공장이 들어설 사우스캐롤라이나와 테네시주가 한국 업체에 힘을 실어주며 최악의 결과를 면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반면 태양광 패널의 경우 국내 업체 중심으로 대응이 이뤄지면서 현지의 우군이 없어 35%의 높은 관세율 판정이 나온 상태다. 주 변호사는 “아웃리치 활동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라며 미국 내에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경우 토요타자동차가 지난 2010년 미국에서 브레이크 오작동 논란으로 홍역을 치를 당시 현지 공장 소재지역 관계자들이나 자동차 업계와 연대했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영토분쟁으로 불매 운동이 일어난 이후 게이단렌(경단련)의 사다유키 사카키바라 회장과 아키오 미무라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을 필두로 한 대규모 경제사절단이 방중해 정부 고위 관계자와 기업인들을 만나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했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위협 요인들

한편 다음달 초·중순으로 예정된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대한 마지막 단계인 USTR 공청회를 앞두고 우리 정부와 업계는 마지막 대응 카드를 고심하고 있다. 현재 한국산 제품이 미국 시장질서를 왜곡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며 한국산 제품에 대한 특별대우나 예외를 요청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베트남 등 다른 지역에서 생산해 공급하는 제품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아 한계가 지적된다.

또 다른 부분은 철강 제품에 대한 부분이다. 미국 무역확장법(TEA) 섹션232(Section 232)에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경우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가 가능한데, 올 8월에도 관련 보고서가 백악관에 올라갔지만 이미 고율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는 점에서 이 조항을 적용한 추가 조치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지 철강업계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경우 내년이나 내후년에 다시 이 카드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려 요소는 남아있다. 또 유정용 강관 판정 건에서 공기업(한국전력)이 공급하는 우리나라 산업용 전기 사용료가 낮은 점을 정부의 보조금 지급처럼 취급했다는 점에서도 역시 불안 요인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들어서는 삼성전자 세탁기 공장 전경. 삼성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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