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농협은행이 현재현(66) 전 동양그룹 회장 개인에게 빌려준 183억원을 떼일 처지에 빠졌다. 현 전 회장의 개인대출을 연장해 주면서 동양그룹 계열사 자산을 담보로 잡은 게 문제가 됐다. 법원은 현 전 회장이 회사 재산을 개인대출 담보로 내놓은 것 자체가 위법한 행위인 만큼 농협이 해당 담보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 오너 개인대출에 회사 재산을 담보로
농협은행은 2007년 8월 현 전 회장에게 100억원, 2008년 8월에는 현 전 회장에게 25억원과 부인 이혜경 전 동양그룹 부회장에게 82억원 등 모두 207억원을 대출했다. 담보는 현 전 회장이 보유한 동양 주식이었다. 농협은 2012년 8월까지 24억원을 회수했고, 남은 183억원에 추가 담보를 요청했다. 그동안 동양 주가가 급락해 대출금에 비해 담보가치가 부족해진 때문이다.
현 전 회장은 동양그룹 계열사인 동양인터내셔널이 보유한 동양시멘트 주식 400만주를 농협에 추가 담보로 내놨다. 1년 뒤인 2013년 9월, 동양그룹이 유동성위기로 공중분해될 상황에 처하자 동양인터내셔널은 서울중앙지법에 기업회생을 신청냈다.
법원은 동양인터내셔널 자산을 동결하고, 채권자들에게 자산을 분배했다. 농협은행은 법원에 동양인터내셔널이 보유한 동양시멘트 주식 400만주에 설정한 근질권을 앞세워 현 전 회장이 빌린 183억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동양인터내셔널은 현 전 회장이 회사 보유 주식을 부당하게 농협은행에 담보로 제공한 만큼 회사가 이 빚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동양시멘트 주식 400만주에 설정해 놓은 농협은행의 근질권 말소를 결정했다. 농협은행은 소송을 냈고,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은 “동양시멘트 주식 400만주에 대한 근질권 설정은 무효”라며 농협에 패소 판결했다.
◇ 법원 “현회장 자택에 근저당 걸면 됐을 일”
법원이 이처럼 판결한 이유는 현 전 회장이 동양인터내셔널 보유의 동양시멘트 주식을 개인대출에 대한 추가 담보로 제공하고 근질권을 설정한 것은 채권자들이 나눌 회사의 이익을 빼돌린 행위(사해행위)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재판부는 “동양인터내셔널이 법률상 의무 없이 대주주인 현 전 회장 일가의 개인대출 채무를 담보해 다른 채권자들의 공동 담보를 감소시켰다”고 설명했다.
이에 농협은행 측은 현 전 회장이 경영난을 숨겨 재산을 빼돌리려 한 의도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맞섰다.
재판부는 “농협은행은 동양 주식이 폭락하자 추가 담보를 요청해 받았으므로 동양그룹의 재무상태가 심각한 상태라는 점을 알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해당 대출은 현 전 회장의 개인 대출”이라며 “현 전 회장이 자신의 그룹 내 지위를 이용해 담보를 내놓은 것이란 사실도 농협은행은 인식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농협은행이 근저당이 전혀 걸려 있지 않은 현 전 회장의 성북동 자택에 대해서는 담보권을 설정하지 않은 데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 재산이 있음에도 회사보유 주식을 담보로 할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다. 농협은 판결에 불복, 항소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법원이 현 전 회장에게 동양사태 책임을 물어 징역 7년을 확정하면서 동양인터내셔널에 농협대출 담보를 제공하도록 지시한 혐의(횡령)도 유죄로 확정한 때문이다.
익명의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현 회장이 근질권 설정 지시로 유죄가 확정된 마당에 재판결과가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농협은행이 처음 담보로 잡은 현 전 회장 소유의 동양 주식은 그룹 회생절차에 따라 감자돼 전량 소각됐다.
농협 관계자는 “규정상 제3자 주식을 담보로 잡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현 전 회장이 현금화하기 쉬운 주식을 담보를 내놓는데 이를 거부하고 자택을 담보로 요구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동양사태가 계열사의 회생절차와 현 회장에 대한 형사처벌로 매듭이 지어지는 상황이지만, 금융기관의 대출금 회수는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현재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수협중앙회)도 현 회장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한 12억6000만원을 받으려고 농협은행과 같은 소송을 냈으나 지난 4월과 9월 잇달아 패소한 상태다. 수협중앙회가 농협은행과 마찬가지로 동양인터내셔널 보유의 동양시멘트 주식을 담보로 잡았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출과정에서 불법적인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문제가 있었다면 엄중히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근질권은 한도액을 정해 채권자와 채무자간 거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채무에 대해 특정 자산을 담보로 잡을 수 있는 권리다. 주택이나 토지 등 부동산에 설정하는 근저당권과 개념이 유사하지만 근질권의 담보물은 주식이나 채권 등 동산에 한정된다. 근질권자는 채권자의 자산에 대한 우선 변제권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