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예산안이 정략의 희생물로 전락했다. 의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검찰, 경찰, 감사원 등 권력기관 예산에 칼을 댔다. 반면 이재명 대표의 간판 정책인 지역화폐 예산은 2조원이나 늘렸다. 내년 예산은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와 맞물려 정쟁의 볼모 신세가 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검찰의 특수활동비 80억원, 특정업무경비 506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이 대표는 공직선거법 위반 등 각종 혐의로 5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예산 삭감이 “검찰 기능을 마비시킬 것”이라며 반발했다. 법사위는 또 감사원의 특활비 15억원, 특수업무경비 45억원도 예산에서 뺐다. 이는 감사원이 최근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해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등 4명을 대검찰청에 수사 의뢰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경찰 예산도 싹둑 잘렸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그제 경찰청 특수활동비 31억 6000만원을 전액 삭감했다. 행정안전부 경찰국 기본경비 예산 1억 700만원도 사라졌다. 야당은 ‘윤석열 퇴진 1차 총궐기’ 때 경찰이 과잉진압했다며 사과를 요구했으나 조지호 경찰청장은 11일 국회 답변에서 이를 거부했다. 이 대표는 “민중의 지팡이라더니 권력의 몽둥이가 됐다”며 경찰을 강하게 비판했고, 민주당은 예산 삭감으로 보복성 군기잡기에 나섰다.
한편 행안위는 정부안에 없던 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을 야당 단독으로 2조원 증액했다. 앞서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지역화폐법은 10월 초 국회 재표결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법적 근거를 만들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엔 예산안에 손을 댔다. 지역화폐는 그 효과를 두고 찬반이 분분하다. 예산이 쌈짓돈도 아닌 바에야 2조원이라는 거액을 그냥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예산을 둘러싼 여야 공방은 매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올해는 다수당의 분풀이가 도를 넘어섰다. 이제 677조원 규모의 새해 예산은 상임위를 거쳐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넘어갔다. 민주당이 수권정당을 자임한다면 사정기관의 특활비, 특경비가 필수 예산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검찰도 늦게나마 특경비 지출 내역을 일부 국회에 제출했다. 예결위 심사 단계에서 권력기관 길들이기용 예산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