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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스물두 살에 결혼한 남편은 스무 살 연상이었다. 존경받는 예술가이자 변혁을 꿈꾸는 혁명가였다. 동시에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리며 절제를 모르는 바람둥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혼을 감행했다. 남편은 자신을 사랑했지만 또 무시했다.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10대 후반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유산은 반복됐다. 끝내 이혼했다. 남편은 처제를 여자로 봤고 여동생도 형부를 남자로 봤다. 참기 어려웠다.
멕시코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1904~1954)는 삶 자체가 극적인 예술가다. 멕시코 쿄요아칸에서 유대계 독일인인 기예르모 칼로와 멕시코 태생의 마틸드 칼데론 부부의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난 칼로는 여섯 살에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성장에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칼로는 독특한 감성과 지적인 능력, 매력적인 외모의 소녀로 자랐고 멕시코 최고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서 남학생이 선망하는 여학생이 됐다.
육신을 치유하는 의사를 꿈꾸던 칼로가 영혼을 자극하는 예술가로 방향을 튼 계기는 열아홉 살에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다. 하굣길에 전차와 통학버스가 충돌, 쇠봉이 허리부터 자궁까지 관통하는 큰 사고였다. 척추수술 후 전신에 석고붕대를 감고 누워 있던 어느 날 칼로는 특수제작한 이젤과 거울을 도구 삼아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발견한 칼로의 재능이었다. 바람둥이 민중화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에게 매혹당해 끝내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된 것도 ‘예술가’로서의 남편을 동경했던 이유도 있다. 칼로는 리베라와 이혼했지만 다시 결합했다. 훗날 “내 인생에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는데 하나는 전차사고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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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국보급 화가로 자국 밖으로 반출이 어렵기로 유명한 칼로의 작품이 한국을 찾는다. 오는 6월 6일부터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프리다 칼로: 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 전을 통해서다. ‘디에고는 나의 마음에’(1943)를 비롯해 ‘원숭이와 함께한 자화상’(1943) 등 회화 6점과 칼로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는 사진, 편지 등의 유품을 함께 선보인다. 리베라의 ‘해바라기’ 등 작품 10여점도 같이 걸어 두 사람의 화풍을 비교해볼 수도 있다. 이외에도 동시대 멕시코 작가 10여명의 작품을 통해 칼로가 이들과 다른 어떤 개성을 갖고 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칼로의 회화가 6점밖에 없는 것이 아쉽지만 작품을 소장한 베르겔재단이 멕시코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어럽게 해외 나들이에 나선 작품들이라 의미가 적잖다.
10대 후반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칼로가 처음으로 작품을 공개한 건 34세이던 1938년 멕시코시티대 갤러리 그룹전에서다. 전시에서 칼로의 작품을 유심히 본 프랑스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르통이 그림을 격찬하면서 단숨에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이듬해 열린 파리 전시에는 유럽을 주무대로 활동하던 살바도르 달리와 칸딘스키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몰려들었고 루브르박물관은 칼로의 ‘자화상: 프레임’ 1점을 구입해 다시 화제가 됐다. ‘자화상’은 루브르가 처음 소장한 라틴아메리카 여성작가의 작품이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높이 평가받았지만 정작 자신은 “내 경험을 그린 현실”이라며 고개를 내젓던 칼로는 200여점을 세상에 남겼다. 회화 143점 중 55점이 자화상이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평생 겪었던 신체적인 고통과 남편과의 불화 등 곡절 많은 삶을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사후에는 남편인 디에고보다 명성이 높아졌고 1980년대 후반에는 팝스타 마돈나가 좋아하는 화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전시는 9월 4일까지. 성인 1만3000원, 청소년 1만원. 02-801-7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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