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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1979년 10월 브라질에서 열린 상파울루비엔날레. 무명의 한 동양 남자가 ‘물 기울기 퍼포먼스’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들고 있는 TV의 기울기만큼 화면의 물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물 기울기 퍼포먼스’는 반응이 뜨거웠다. 비디오아트라는 개념이 서구에서도 생소하던 때, 선진국 출신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던 전위예술을 시연해서다.
명성은 이내 퍼져 1980년 9월 프랑스 파리시립미술관과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파리비엔날레에 초청받았다. 현지에서 구한 돌로 탑을 쌓은 뒤 그 사이에 TV를 끼워 넣고 돌의 영상을 화면에 노출시킨 작품 ‘무제’를 전시했다. 영상이 발전할수록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실을 예견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오는 5월 25일까지 열리는 ‘박현기 1942-2000 만다라’ 전은 백남준과 함께 국내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박현기의 작품과 유품 등 1000여점을 전시하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때 박현기는 건축가 김수근의 영향을 받아 건축도 배워 학교 졸업 후 대구를 거점으로 건축 및 인테리어 사업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훗날 대구에서 건설업이 성장하자 박현기도 ‘떼돈’을 벌며 비디오아트 제작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박현기가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73년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우연히 백남준의 ‘글로벌그루브’의 영상을 본 다음부터다.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잊고 생계에 함몰돼 있던 박현기에게 백남준은 충격이자 구원이었다. 이후 박현기는 1974년부터 시작된 대구현대미술제의 주요 작가로 참여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나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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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박현기 회고전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도 뜻깊다. 2012년 기증된 ‘박현기 아카이브’ 2만여점을 2년간 정리한 후 이 중 엄선된 1000여점을 3300㎡(약 1000평)의 공간에 전시했다. 기증과 정리, 대형전시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1977년 ‘포플러 이벤트’ 기록사진을 비롯해 1997년 뉴욕 킴포스터갤러리에서 전시한 ‘만다라’, 유작인 2000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개인코드’까지 전시작의 면면을 보면 이질적이지 않으면서도 전위적이었던 박현기의 작품을 체감할 수 있다. 흔한 돌덩이 같은 소재와 당시에는 고가였던 가전기기가 혼재한 작품들은 묘한 미적 균형을 이루며 사물을 보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작품 외에도 직접 그린 회로 노선도, 한때 우상이자 ‘비디오아트’의 전선에 함께 섰던 백남준과 교류했던 사진들, 1970년대 대구 현대미술의 중흥을 이끌었던 박서보, 이우환 등과 나눈 서신 등은 작가의 ‘수집벽’ 덕에 온전히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예술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하면서도 끊임없이 ‘서구와 동양’이란 틀을 고민했던 작가의 고뇌가 적힌 일기 등은 시대를 앞서 간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국가나 기관으로부터 후원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돈으로 작품을 만들었던 창작 여정도 흥미를 끈다. 사업으로 번 돈으로 직접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덕분에 당시로선 고가였던 영상장비를 활용해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작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IMF로 인해 사업이 급속도로 몰락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며 “그럼에도 유가족들이 자료와 작품을 잘 보관해와 이번 전시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만 24세 이상 2000원, 24세 미만 무료.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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