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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성 민주주의의 개막

편집부 기자I 2013.01.08 08:38:10
대선이 끝났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가 호명하는 새로운 권력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다. 대한민국이 조용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엄동설한이지 정치는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지배의식이 이념적 의식에서 연극적 의식으로 전환했다고 주장하는 엔터테인먼트 정치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대선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가른 대선이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한 겁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 18대 대선의 역사성을 이해하려면 전국 학력고사 1등으로 서울대 법대를 합격하고 사시를 패스한 수재 이정희 후보의 경박한 이성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대선 토론회에서 자신의 출마 목적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율사 출신답게 이성과 논리로 토론회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정희 후보의 이성과 논리는 다수 유권자들에게 무례와 독선으로 받아들여졌다. 박근혜 후보의 지지자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정희의 경박한 이성이 박근혜 후보를 기어코 대통령에 당선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잠깐 환호 받던 이정희 후보는 무례하고 건방진 정치인 정도가 아니라 선거보조비 27억원을 꿀꺽 삼킨 먹튀녀로 낙인 찍혔다.

준엄한 이성과 논리도 유권자들의 감성의 파도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 여직원에 대해 “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어린 국정원 여직원을 집에 ‘감금’하고 가족이 찾아가도 못 만나게 하느냐”며 감성에 호소한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반면 “국정원 여직원은 스스로 문을 잠근 ‘잠금’이지 감금은 아니며, 경찰은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칠 사건이니 즉각 진입했어야 했다”고 논리적 주장을 했던 표창원씨는 경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고 백수가 됐다.

또 이번 대선에서는 보수 정당이 실종되었다. 한나라당은 지난 총선부터 경제 민주화를 앞장세우고 당의 상징 색깔을 파란 색에서 빨간 색으로 바꿨다. 보수 정당이 적기를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당의 강령에서도 ‘보수’라는 단어를 삭제하기 일보직전 까지 갔다. 새누리당은 보수 정당이라기보다는 미국 민주당 정도의 진보적 색채의 중도 정당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진보와 진보의 대결이 되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대선 공약이 하도 비슷해 구별하기도 힘들었다.

보수 정당이 사라지면서 후보들의 경제성장율 공약도 사라졌다.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을 747 공약 (7% 성장률+4만불 국민소득+세계7위 경제 대국)으로 상징화하면서 유권자들에게 부자의 꿈을 주었다. 후보들이 얼마나 경제 성장률에 집착했는지는 7% 성장률은 허구라며 6% 성장률을 공약한 정동영 후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대선 공약 전쟁의 상징인 경제성장율에 대해 유권자도 질문하지 않고 후보들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18대 대선에서 이성, 이념 그리고 숫자가 패배하고 실종되었다. 그 비어있는 자리를 감성, 연극 그리고 공감의 정서가 대체했다. 민주주의는 원래 이성을 통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대립적인 이념적 정파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 과정이 바로 근대 숙의 민주주의의 요체다. 그런데 2012년 대한민국에서 이성, 이념, 숫자로 구성되는 숙의 민주주의가 감성, 연극, 공감으로 구성되는 유권자들의 새로운 정치 의식에 패배한 것이다. 근대 정치학은 이것을 민주주의의 패배로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데모크라시(democracy)의 올바른 번역은 민주정(民主政)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성적인 숙의를 통해 민중의 다수 의사를 구하는 것은 민주정이 작동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21세기는 스마트폰이 유권자들의 일상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 빅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총기록(總記錄)의 시대다. 이번 대선에서 필자는 감성, 연극, 공감을 통한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버전이 실험되었다고 생각한다.

강한섭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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