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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 정부가 과중채무자들의 빚을 감면해 주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도덕적해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상자 선정에 유의하겠다고 말했다. ‘도덕적 해이’는 채무 감면을 이야기할 때마다 반복되는 후렴구 같아서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 정도의 인식으로 우리나라가 직면한 과중채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변제하지 못한 채무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지지 않게 하는 면책제도는 1705년 영국에서 처음 법제화되었다. 일정비율 이상의 채무를 변제하고, 일정 수 이상의 채권자가 동의한 경우 법원의 심사를 거쳐 잔존채무를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면책제도는 입법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입법에 성공한 뒤에도 끊임없는 ‘도덕성’ 논란이 휩싸였다. 안 갚은 채무를 면책해 주면 누가 힘들여 빚을 갚으려 하겠는가, 면책제도는 부도덕한 결정을 하도록 유인한다는 비판이었다.
그런 논란 속에서 면책제도가 채권자의 시혜가 아니고 채무자의 권리로 정착된 것은 미국의 1898년 도산법이다. 우리나라의 면책제도는 1962년 도입되었는데 첫 면책 판결은 1998년에 나왔다. 서양에서 면책제도가 정착하는데 200년 가량 걸렸는데 우리나라는 36년 걸렸으니 그래도 고속성장이라고 위안해야 하나.
면책제도에 대한 도덕성 논란을 들어보면 빚을 못 갚는 사람은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심성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빚을 안 갚는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빚을 못 갚고 과중한 채무를 지게 되는 것은 수입이 줄었든지 지출이 늘었든지 아니면 둘 다인 경우이다. 수입이 줄어든 것은 사업에 실패했든지 실직한 것인데 그것이 도덕과 별 관련이 없는 것은 자명하다.
지출이 늘어난 것은 과소비나 도박같이 부도덕한 행위 때문일까? 파산자들의 지출내역을 조사해 보면 첫째는 기본적인 생계비이다. 빚이 많다고 길거리에서 자고 굶어 죽을 수는 없다. 수입이 없어서 빚을 내어 월세를 내고 쌀을 사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할 수는 없다.
둘째 이유는 의료비이다. 개인신용회복절차 신청서를 분석해 보면 채무발생의 원인으로 1/3이 의료비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전세계적으로 성공사례로 꼽힌다지만 기본적으로 감기보험이다. 감기 정도의 가벼운 질병에는 개인 부담이 거의 없지만 뇌졸중이나 치매같이 지속적으로 비용이 드는 질병의 경우에는 개인부담이 엄청나다. 요즘 들어서야 ‘의료파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이미 수십만명이 의료비 때문에 대출받고, 집 팔고, 파산했다. 셋째는 교육비이다. 지금 어려워도 자식 교육은 시켜야 한다는 게 우리나라 보통 부모의 생각이다. 빚이 많은데도 한 달에 10만원 드는 학원에 보낸다고 부도덕 하다고 할 수는 없다.
면책제도가 있으면 채무자가 일부러 돈을 갚지 않고 면책을 받으려고 할까? 우선 채권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채무자의 재산이나 수입이 확인되는 순간 채권자는 즉시 강제집행에 나선다. 4대 보험을 납부하는 직장에 취업하면 2달 내에 급여압류가 들어온다. 연체자라는 딱지가 붙으면 정상적으로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없다. 면책 후에도 채권자는 연체사실을 잊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불이익이 불가피하다. 뿐만 아니라 면책을 신청하는 대부분의 과중채무자들은 자존심의 큰 상처를 받는다. 이렇게 면책에 따른 비용이 워낙 크기 때문에 과중채무자의 20-30%만이 면책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면책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한창일 때 당시 영국 법학계의 태두였던 블랙스톤은 “면책제도는 채무자에 대한 은전이 아니다. 과중채무에 시달리는 채무자를 면책해서 채무자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리하기 때문에 면책하는 것이다”고 설득했다. 그의 설명은 240년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현실적으로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채권으로 과중채무자들을 묶어 노예처럼 살게 하면서 국가 재정에서 부조를 할 것인지, 아니면 못 받을 채권은 다 털어내고 채무자들이 열심히 일하게 하고 세금도 내게 할 것인지,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오수근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법원 회생파산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