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1922년생. 만으로 94세인 노화가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려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말했다. “잊지 않고 나를 찾아줘서 너무 고맙고 기분이 좋다. 화가가 전람회하는 것 만큼 좋은 일이 어디있겠나.”
백영수 화백은 한국미술계의 산 증인으로 꼽히는 작가다. 일제강점기 경기 수원에서 태어나 두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뒤 1940년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해 근현대미술을 익혔다. 1944년 귀국한 후 목포고등여학교와 목포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1946년 20대 중반에 도상봉·박영선·이응로·박고석·김환기·이마동·이상범 등 쟁쟁한 작가들과 함께 제1회 조선미술전의 심사를 맡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연 ‘백영수 개인전’은 백 화백이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 이후 4년 만의 개인전이다. 백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초까지 제작한 드로잉과 콜라주 등 신작 25점과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창가의 모자’ ‘산동네의 모자’ ‘나르는 모자’를 비롯해 ‘귀로’ ‘가족’ 등 대표작 15점을 더해 4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
백 화백은 신사실파의 동인으로도 유명하다. 신사실파는 ‘새로운 사실화를 추구하자’며 1950년대 전후의 혼란기에도 김환기·이중섭·유영국·이규상·장욱진 등이 결성한 모임. 이후 서정적인 추상세계를 추구하며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반추상화로 한국현대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다.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 뉴욕을 거쳐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의 요미우리아트센터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파가니화랑의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유럽 화단에서도 인정받았다. 보편적인 주제인 어머니와 자식의 모습을 담은 ‘모자상’이 인기를 끈 덕이다.
|
2011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백 화백은 1970년대 직접 지었다는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아래 자택에서 부인인 김명애 여사와 살고 있다. 안타깝게도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이후 건강이 쇠약해져서 일상적인 의사소통이나 생활은 물론 작품활동도 김 여사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상태다. 손에 힘이 없어 붓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탓이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백 화백의 신작에 대해 “종이박스를 펼쳐놓고 영수증과 같은 일상의 사물을 이용한 콜라주 작품 등을 보면 놀이의 세계에 푹 빠져 이해를 초월한 탈속의 세계에 도달한 듯하다”고 평했다.
백 화백은 ‘왜 평생 모자상을 그렸느냐’는 질문에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답했다. “아이하고 엄마는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가 없다. 아이는 엄마 품을 생각하고 엄마는 아이를 영원히 잊지 않는다. 그 영원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곤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나만 운이 좋아 살아 있다. 이왕 산 김에 100살까지 살아야겠다. 4~5년 남았는데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전시는 10월 23일까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