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천구에 있는 소규모 작업실에서 가방제작을 하는 임동용(58) 씨는 미싱을 돌리며 자신의 처지를 푸념했다. 그는 하루 13시간 동안 일을 하지만 가족과 조촐한 외식도 망설일 정도로 수입이 신통치 않다. 생계를 위해 그의 아내는 근처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
비단 임 씨만의 일이 아니다. 서울 양천구 화곡로 일대에 밀집한 가방제조업체 대부분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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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을 열고 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82㎡(약 25평) 남짓한 공간에는 미싱기 3대가 벽 쪽으로 놓여 있었다. 그 주변을 빼곡히 스티로폼과 가방끈이 메우고 있고 형광등 3개가 어두운 공간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마저도 요즘 신학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규모라고 한다. 가방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정학채(53) 대표는 “신학기가 지나고 4월이 되면 일감이 없어 그야말로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6월이 지나고 벌어 놓은 돈이 떨어질 때쯤이면 많은 기술자들이 막노동을 하러 인력사무소를 찾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돈이 없으니 사채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박인균(54) 두레산업 대표는 “공장을 유지하기 위해 29% 고금리에 돈을 끌어다 썼다. 늦깎이 결혼을 해 아이가 없는데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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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70년대 김포국제공항이 대한민국 항공 물류의 중심이 되면서 양천구 일대에 중소형 가방제조업체들이 모여들었다. 이착륙 비행기의 소음으로 양천구 일대 임대료가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2000개가 넘는 가방 업체들이 자리를 잡았다. 업체별로 많게는 월 2만개가 넘는 가방을 제작하던 시절도 있었다. 기술력도 인정받아 샤넬이나 구찌 등 명품 브랜드도 양천구 가방업체에 저가 모델을 위탁 생산했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술집이나 식당가도 성행해 하루 24시간 활기찬 분위기였다고 이곳에서 오래 일한 근로자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인건비가 저렴하고 인력이 많은 중국에서 대량으로 가방을 제작하면서 이곳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가방 하나를 제작해 거두는 인가공 수익은 20년 전 550원에서 600원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물가상승폭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익으로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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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양천구 45개 가방 제조업체가 모여 ‘양천가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아직 출범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오는 8월 중국 연길 경위락천지백화점에 조합 매장이 입점키로 하는 등 성과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 양천구청의 도움으로 양천구 국·공립 어린이집에 2400개 물량을 공급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최근에는 젊은 청년들의 열정도 보탬이 되고 있다. 조민우(32) 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 뒤를 이어 가방제작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친구 다섯 명과 함께 자신만의 브랜드 제작을 추진 중이다.
조 씨는 “외국에서는 장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못 배운 사람들 또는 노동자로 취급받는다. 이런 인식을 바꿔보고 싶고 우리도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품질의 가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가방 제작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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