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냉면 2000원, 갈비탕 3000원, 김치국밥 2000원…. 10일 오후 7시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 앞 '선비옥'. 테이블 8개 작은 식당의 자리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있다.
"거기 문밖에 서있는 분들 여기 와서 같이 먹어요." 냉면을 먹던 한 40대 남성이 자리가 없어 기다리는 두 손님에게 손짓을 했다. 기다리던 한 단골손님은 배종수(47) 사장에게 "자리 생길 때까지 동네 한 바퀴 돌고 올게"라며 자리를 떴다. 손님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물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셨다.
배 사장은 "원가를 아끼려고 가스레인지 위에 뚝배기를 2~3단으로 쌓아놓고, 조리하면서 생기는 열로 뚝배기를 따뜻하게 만든다"며 "500원이 모자라 밥 못 먹는 사람도 있는데 가격을 함부로 올릴 수 없다"고 말했다.
초(超) 고물가 시대, 음식 값들이 줄줄이 오르고 있다. 하지만 올 들어 한 달에 900곳씩 음식점이 문을 닫는 한계 상황에서도, 수십 년째 값을 올리지 않거나 도리어 내리는 곳도 있다.
이들 '가격 파괴' 식당의 놀라운 경쟁력의 비밀은 무얼까. 치열한 원가(原價) 절감 노력, 그리고 단골 고객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음식점 주인들의 정(情)과 의리였다.
◆"단골 배신 못해요… 우리가 아껴야죠"
탑골공원 근처 '부자촌 왕뼈 수제비 감자탕'은 올해 초 냉면 값을 3000원에서 2000원으로, 콩국수 값을 2000원에서 1000원으로 내렸다. 전영길(61)사장은 "불황 때 물가를 따라 음식 값을 올리면 손님들이 안 오신다. 값을 내리니 손님이 1.5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콩국수와 냉면은 음식이 나온 뒤 보통 5분 만에 먹고 일어나기 때문에 테이블 회전이 빠르다. 가격을 내려도 손님이 더 찾으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었다.
'선비옥'도 올 초 갈비탕 값을 5000원에서 3000원으로 냉면 값은 4000원에서 2000원으로 내렸다. 배 사장은 "가격을 내리니 손님이 2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인근의 '초원식당'은 콩국수 가격을 1500원에서 1000원으로 낮췄다. 냉면은 2000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면발을 싼 제품으로 바꾸고, 계란을 뺐다. 이기복 사장은 "원래 3000원짜리 메뉴가 많았지만, 1000원짜리 드시는 분들이 자존심 상할까봐 하나만 빼고 다 없앴다"고 말했다.
◆더 싼 재료 찾아 경매시장으로
서울 동대문의 '짱가짜장'은 자장면이 1500원이다. 이 식당은 면을 삶고 씻은 물을 그릇 설거지에 쓴다. 한 종업원은 "면을 삶을 때 쓴 물은 뜨거워서 설거지가 잘 된다. 세제와 물을 동시에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재료비를 아끼려 양배추 등은 구리농수산물시장에서 경매를 받아오고, 기름 값 들어가는 배달 주문은 안받는다. 이 식당에선 모든 것이 셀프 서비스다.
종로3가 '황태식당'의 황태해장국과 우거지탕은 2000원이다. 김순임(62) 사장은 "2000원 없어서 굶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값을 올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식당은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식당이 문을 열기 전인 오전 5~10시 사이에 문을 열어 아침 손님을 받는다.
탑골공원 인근의 '고향집' 식당에선 선지해장국과 순두부가 2000원이다. 노인들이 끼니를 거를까 싶어 값을 올리지 못했다. 박제환(39) 사장은 "최근에 방앗간을 옮겨 원래 2만원 하던 들깻가루를 1만6000원에 들여온다"며 "작년에는 에어컨을 틀었지만 올해에는 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정과 의리로 영업
종로3가 '유진식당'의 문용춘(82) 사장은 "20~30년간 한 거래처와 현금으로만 거래하면서 생긴 의리로 녹두·메밀·야채 등 주요 재료는 옛날 가격 그대로 공급받고 있다"며 "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집의 설렁탕과 국밥 값은 2500원에 고정돼 있다.
인근 '소문난해장국'의 우거지얼큰탕 값은 여전히 1500원이다. 권영희 사장은 "가게가 내 집이라 임대료를 안 낸다"며 "꾸준히 찾는 단골손님이 워낙 많아 낮은 가격에도 장사를 계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격을 올려도 학생과 군인에게는 할인해주는 곳이 있다. 남대문시장의 '한순자 칼국수'는 3개월 전에 각 메뉴의 가격을 500원씩 올렸다. 한순자 사장은 "재료 값이 너무 올라 어쩔 수 없이 올렸지만, 학생·군인·전경에게는 여전히 일반 판매가보다 싼 3000원만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집은 칼국수를 먹든, 보리밥을 먹든 냉면을 공짜로 끼워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광화문 '송백부대찌개'는 최근 1인분에 5000원하던 부대찌개 값을 10년 만에 6000원으로 올렸다. 이 집은 라면과 밥이 무제한 서비스되는 집이다. 양국자(57) 사장은 "촛불집회 때 시위 막으러 온 전경에게는 5000원만 받았다"며 "배고픈 전경들이 밥 2공기에, 라면 3개씩을 먹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