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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가 잠든 사이, 은하수가 놀러왔다 [여행]

김명상 기자I 2024.08.23 06:00:00

해발 1100m에 펼쳐진 드넓은 배추밭
밤이면 쏟아질 듯 빛나는 별 관측까지
여성 홀로 3000개 돌탑 쌓은 모정탑길
26년간 가족 위해 공들인 정성에 감탄
구름도 쉬는 운유길 걷는 바우길 매력
산행, 캠핑, 별 관측 등 한꺼번에 가능

밤이면 ‘별천지’로 변하는 안반데기 전경 (사진=강릉시 제공)
[강릉=글·사진 이데일리 김명상 기자] 태백산맥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나타나는 드넓은 배추밭. 가파른 능선에 가지런히 배열된 배추들의 모습이 산속 정원처럼 이채롭다. 멀지 않은 곳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현실에 구현한 듯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길도 있다. 바다가 유명한 강릉이지만 뒤를 돌아보면 또 다른 매력이 펼쳐진다.

◇드넓은 배추밭과 별천지의 만남

해발 1100m에 있는 고랭지 채소 단지 안반데기와 풍력발전기
험준한 산 능선에 자리한 해발 1100m의 고지대 배추밭. 이곳의 이름은 안반데기다. 잘 꾸민 관광지처럼 보이는 안반데기는 사실 1960년대 화전민들의 피땀이 어린 장소다.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이들이 모여 깊은 산 속에 들어와 밭을 일군 것이 시초다. 급경사 탓에 기계 농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오로지 삽과 곡괭이, 소를 이용해 개간했는데, 축구장보다 280배 큰 200만㎡의 규모로 일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충이 있었을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밭에서 일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곳을 더욱 이국적으로 보이게 한다. 동남아식 삼각 모자를 쓴 사람들이 많은 게 의아해 물어보니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라고 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배추는 이제 글로벌 작업의 결과물이 되었다.

이승석 강릉시 관광개발과 팀장은 “거주 주민이 25가구 정도뿐이라 일손이 늘 부족하다”며 “산속에서 일하려는 내국인이 많지 않다 보니 외국인의 노동력이 없으면 농사를 짓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안반데기에 펼쳐진 대규모 배추밭
8월 말에서 9월 초에 배추 출하가 시작되는 만큼 지금의 푸른 모습은 곧 사라진다. 안반데기에서 생산된 배추는 대관령 찬바람을 맞고 자란 덕에 조직이 치밀해 아삭하고 당도가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안반데기 배추가 국내 배추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 이유다.

해가 진 뒤 안반데기는 ‘별천지’로 바뀐다. 하늘 바로 아래 자리한 마을이라 MZ세대 사이에선 빛 공해 없이 은하수를 관찰하기 좋은 별 여행 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은 카페 ‘와우안반데기’ 뒤편에 있는 일출전망대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방문객은 “강릉이 고향인데 어린 시절 부모님과 이곳에 왔다가 엄청나게 펼쳐진 별을 보고 충격받고 감동한 적이 있다”며 “고향을 떠난 지금도 그때 광경이 생각나서 가끔 찾아오곤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 사랑을 체감하는 ‘모정탑길’

3000여 개의 돌탑이 있는 노추산 모정탑길
약 500m 길이의 노추산 계곡을 따라 여기저기 늘어선 돌탑 3000여 개. 이 모든 걸 여자 혼자 힘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안반데기에서 약 15㎞ 떨어진 노추산 모정탑길은 한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이 스며있는 곳이다. 주인공인 차순옥 여사는 집안의 평안을 바라며 3000여 개의 돌탑을 이곳에 쌓았다. 차 여사는 결혼 후 4남매를 두었으나 아들 둘을 잃고 남편은 정신 질환에 시달리기도 했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40대 중반, 차 여사는 현몽을 꾸게 된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돌탑 3000개를 쌓으면 집안이 평안해질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후 차 여사는 노추산 계곡에 자리를 잡고 2011년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6년 동안 돌탑을 쌓았다.

돌탑의 정교함이 놀라운 수준이다. 여자 혼자 큰 돌을 나르는 것만으로도 무척 힘이 들었을 텐데 치밀하게 쌓는 작업을 대체 어떻게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는 돌탑들을 보니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3000여 개의 돌탑을 쌓은 차순옥 여사의 거처
모정탑길 끝에는 차 여사가 기거하던 작은 거처가 남아 있다. 한 명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26년을 오직 돌탑 쌓기에 집중한 차 여사의 실제 사진도 함께 놓여 있다.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을 이처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훗날 여사의 남편도 완쾌하고 남은 가족들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한 산림청은 2016년에 강릉 노추산 삼천 모정탑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하며 그 보존 가치를 인정했다.

율곡 이이가 노추산 이성대에서 수학할 당시 남긴 비석
모정탑길 초입에는 아홉 번의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율곡 이이의 흔적도 남아 있다. 노추산 이성대에서 수학할 당시 쓴 글을 새긴 비석인데 수능을 앞두고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강릉 바우길 걸으며 캠핑까지

노추산 모정탑길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탑
안반데기와 모정탑길을 차분하게 걸으면서 즐기고 싶다면 ‘강릉 바우길’ 17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강릉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호와 정동진까지 이어지는 산맥과 호수, 바다를 걷는 약 400㎞의 길로 총 17개 구간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 안반데기를 걷는 17구간의 이름은 ‘운유길’로 구름도 노닐다 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약 6㎞에 달하는 운유길은 안반데기 운유촌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해 일출전망대와 성황당을 찍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2~3시간 코스로 구성됐다. 너른 안반데기의 절경을 내려다보면서 대관령의 맑은 기운까지 가슴 가득 채울 수 있는 코스다.

이곳에서 차로 20분 거리로 가까운 노추산 모정탑길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노추산힐링캠프를 출발해 돌탑을 쌓은 차순옥 여사의 암자를 다녀오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자연의 풍요로움과 어머니의 사랑까지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어 가족 동반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이기호 강릉바우길 사무국장은 “17코스 걷기 시간이 짧아서 가까운 모정탑길을 연계하면 괜찮은 하루 일정의 코스가 만들어진다”며 “모정탑길 입구에 캠핑장이 있는 만큼 1박을 하면 산행과 별 관찰, 캠핑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강릉바우길 5코스에 포함된 강문해변 전경
강릉 여행이 처음이라면 강릉바우길 5코스 ‘바다호숫길’ 구간을 추천한다. 경포호, 경포해변, 강문해변, 소나무 숲길, 안목해변 커피거리, 솔바람다리, 남항진 등 강릉의 주요 명소를 포함하는 길로 관광과 걷기 여행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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