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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란 농촌진흥청 과장] ‘드라마의 공식’ 같은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갑자기 헛구역질하며 화장실로 뛰어가는 장면. 조연들은 ‘뭘 잘못 먹었나’ 걱정하면서도 이내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넘긴다. 그러나 시청자는 안다. 여주인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막대기’를 들고 남편, 연인에게 임신을 알릴 것이다. 이 작은 막대기는 ‘임신진단 키트’다. 항원·항체 반응을 이용해 체내 분비 호르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산부인과에 갈 필요 없이 간편히 확인할 수 있어 많이 쓰인다.
농업에도 ‘임신진단 키트’ 같은 기술이 있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원예작물 바이러스 진단 키트’가 그 주인공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채소의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농업인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150여종의 농작물 바이러스 병이 있다. 기후변화와 농산물 교역 증가는 농작물 바이러스 피해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농작물이 잘 자라지 못하거나 과실 기형, 흉한 얼룩 반점 형성 등 증상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수확량과 상품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려 농가에 큰 시름을 안기는 건 매한가지다. 다른 병이나 해충과 달리 마땅한 치료방법도 없다. 감염을 예방하거나 초기에 발견해 조처하는 게 최선이다.
사용 방법도 간단하다. 진단하려는 채소작물의 잎이나 줄기를 으깨어 그 즙액을 키트에 올려놓고 반응을 보면 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면 지정된 위치에 짙은 색의 선이 나타난다. 현장에서 2분 안에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007년 개발된 이후, 수박, 오이, 멜론, 고추, 토마토 등 10개 작물 주요 바이러스 15종을 대상으로 지역 농업기술센터에서 농가에 무상 서비스한다. 이 키트의 원가는 3000원, 시중에 판매 중인 외국산 진단 키트가 1개당 8600~1만7024원인 것과 비교하면 수입대체 효과도 크다. 또 지난 12년 동안 5000억원 이상, 연평균 400억원 이상의 농가피해를 예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작물 바이러스 병은 농업인이 현장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애로사항이다. 곰팡이나 세균 병은 특징이 있어 진단이 쉽지만 바이러스는 증상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해서 눈으로 진단이 어렵다. 치료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많은 농업인이 이상 증상의 원인도 모르고 이것저것 약제를 뿌리며 걱정만 하다가 바이러스 병을 키우고 농사를 망치기 일쑤다. 조금만 일찍 원인을 밝히고 조처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안타까운 사연들을 많이 접한다.
이 원예작물 바이러스 진단 키트가 농업 바이러스 진단 전문가를 현장에 배달해주는 ‘퀵서비스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멀리서 전문가가 찾아와 진단해 주지 않더라도 자신이 키우는 농작물의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직접 확인해 발 빠른 대책을 마련하기를 바란다. 임신 여성이 진단 키트로 임신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축복받은 새 생명을 위해 휴식이나 건강관리 등 필요한 조처를 하듯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