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호근 국립오페라단장의 책은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다. 우리말이 아닌 독일어로 쓰인 책을 어딜 가든 들고 다니며 틈틈이 읽는다. 이만리 타국 독일에서 생활에서부터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품에 챙겼다. 하루에 한 문단, 한 구절이라도 읊어야 직성이 풀린다.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오페라단장실에서 만난 그는 “20여 년 간 타향생활을 하면서도 놓지 않은 건 이 책이었다”며 “이방인인 내가 독일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이해한 덕분”이라고 밝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신의 죽음’을 말하며 지상의 의의를 주장했고, ‘영원회귀’로 삶의 긍정에 대한 개념을 밝혔다. 특히 불완전성이나 제한을 극복한 이상적 인간(理想的人間)인 ‘초인’을 개념을 만들어 인간 자체의 삶과 철학적 사유를 담아냈다. 윤호근 단장은 “독일에 처음 갔을 때 독일인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이 책이 도움을 줬다”며 “200년 전 사상가의 책을 읽은 것이 독일 오페라계의 일원으로 활동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서라는 말에 “번역서가 아니라 독일어로 읽으니 훨씬 접근하기가 편하더라”며 웃었다.
“독일 오페라를 깨우치려면 독일인을 이해해야 합니다. 독일인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을 알아야 했죠. 합리적인 독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논리로 무장해야 합니다. 논쟁이 아니라 토론으로 올바른 방향을 찾아내는 독일인의 기질은 오페라하우스에서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어렵지만 한 구절이라도 천천히 읽으며 음미하려고 했습니다. ‘탁월한 사람이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기에 탁월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입니다. 20년 가까이 독일에 지내며 니체의 저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윤 단장은 지난 2월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이자 단장으로 취임했다. 1990년대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만하임 국립음대에서 피아노실내학과와 지휘과에서 수학했다. 1999년 독일 기센 시립극장 부지휘자로 취임한 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 부지휘자, 베를린 국립극장 부지휘자를 거치며 독일 오페라의 진수를 깨쳤다. 이방인이었으나 오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독일에서 버텼다. 지금은 세계가 인정하는 독일 오페라의 DNA를 고국에 이식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국립오페라단은 윤 단장 취임 후 오페라 ‘마농’을 비롯해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을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내달 6일부터 모차르트가 쓴 ‘코지 판 투테’를 무대에 올린다.
윤호근 단장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주는 생각과 그 생각으로 오페라로 이어낸 건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의 사상을 정리한 것이고 오페라는 인간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음악에 풀어놓은 것”이라며 “오페라는 단순한 음악극이 아닌 인간의 삶에 가장 가까운 총체적인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모차르트가 쓴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대혁명과 이어지며 극중에는 중세 유럽의 영주들이 행사하던 초야권(결혼 첫날밤에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동침하는 권리)이 숨어 있다.
“오페라는 공부가 필요한 예술이죠.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에 인간의 온갖 흥망성쇠가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입에 담기 거북한 말이나 망측한 내용도 있죠. 21세기 막장드라마 보다 더한 내용을 18세기 작곡가들이 썼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로 노래하기에 현지인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자막도 한계가 있고요. 하지만 노래의 내용과 극의 배경을 미리 알고 ‘오페라 텍스트’를 이해한다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오페라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죠.”
윤호근 단장은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오페라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주입식이 아니라 직접 감상하며 느끼는 이른바 체험형 오페라 교육이다. “아이들에게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고 달달 외우게 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보다 오페라 아리아를 직접 접하는 게 중요합니다. 성인이 되어 오페라를 접하기 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 때여야 합니다. 국립오페라단에서 찾아가는 소규모 오페라 공연을 하고 있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기관에서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입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는 해다. 윤호근 국립오페라단장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 한국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춰 오페라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전쟁을 소재로 하거나 전후 달라진 인간의 삶을 아름다운 아리아에 싣는다. 이를 통해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는 게 목표다.
“인간의 삶이라는 건 참 복잡합니다. 그 복잡한 걸 예술이라는 매개로 만들어진 게 오페라입니다. 시대를 상징하는 많은 요소들이 녹아있죠. 국립오페라단은 이제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모순마저 표현하려 합니다. 허투루 할 수는 없죠. 꼼꼼히 준비를 해야 하기에 당대의 철학자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힌트를 얻으려 합니다. 중심에는 ‘인간’이 있지요.”
◇윤호근 국립오페라단장은
△1967년 경기도 고양 출생 △1985년 서울예술고 졸업 △1991년 추계예술대 피아노학과 졸업 △1996년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 피아노실내악과 졸업 △1999년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 지휘과 졸업 △1999년 독일 기센 시립극장 부지휘자 △200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 부지휘자 △2007년 독일 캄머오퍼 프랑크푸르트 객원지휘 △2009년 독일 베를린 국립극장 부지휘자 △2012년 국립오페라단 서울오페라단 객원지휘 △2018년 국립오페라단장 및 예술감독 △‘달이 물로 걸어오듯’ ‘봄봄’ ‘동승’ ‘라보엠’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마탄의 사수’ ‘파우스트’ ‘헨젤과 그레텔’ ‘디도와 애녜아스’ ‘유쾌한 미망인’ ‘아틀란티스의 황제’ 등 다수 지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