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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국내 시중은행에 입사한 김모(28·남)씨. 지방 지점에서 근무했던 김씨는 청약저축이나 펀드 판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상사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다. 실적을 채우기 위해 가족이나 지인 명의로 펀드를 여러개 가입하기도 했다. 은행 마감이 끝난 뒤에는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며 은행 애플리케이션 가입을 권유하는 등 쉴틈이 없었다. 김씨는 결국 1년 6개월 만에 직장을 관뒀고 현재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중소기업 과장인 천모(40·남)씨는 술자리를 유난히 강요하는 상사 탓에 건강이 나빠졌다. 천씨의 상사는 일주일의 4~5일은 천씨를 붙잡고 술을 마셨다. 천씨가 당뇨를 이유로 술자리를 피하면 교묘하게 괴롭혔다. 천씨가 결재 서류를 가져갈 때마다 사소한 이유를 들어 트집을 잡았다. 또 술을 마시지 않아도 자리를 지키라고 하고 대신 운전을 시키기도 했다. 천씨는 지금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중이다.
최근 한 대형병원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원인이 직장 내 괴롭힘중 하나인 ‘태움’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등 직장 내 괴롭힘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은 법적처벌이 쉽지 않아 피해자들이 속앓이만 하거나 직장을 이·퇴직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상호 간 존중 문화 조성과 함께 피해자 구제위원회 설치 등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 직장인 10명 중 7명 직장내 괴롭힘 피해 겪어
11일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30인 이상 사업체 종사자 중 만 20세 이상 50세 미만 근로자 2500명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한 결과 최근 5년 간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한 사람이 66.3%에 달했다.
가장 최근에 당한 괴롭힘 유형으로는 명예훼손·모욕·폭언을 비롯한 ‘정신적인 공격’이 24.7%로 가장 많았다. 업무상 불필요한 것을 지시하는 등의 ‘과도한 업무’(20.8%), 소외·무시 등 ‘인간관계에서의 분리’(16.1%)가 그 뒤를 이었다.
문제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법적인 처벌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폭행과 폭언 등 법령상 규정된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피해자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증거나 증언을 모아야 한다. 상습적인 폭행과 폭언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증거를 모으기가 쉽지 않은데다 따돌림이나 업무와 관련된 일을 과다하게 시키는 것은 더욱 처벌이 어렵다.
반복하는 직장 내 괴롭힘에도 피해자들이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 현행법상 범죄로 규정해 처벌할 수 있는 행위는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을 비롯한 폭행 정도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직장내 괴롭힘=인권침해 인식 필요”
우리나라와 달리 다른 나라들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했다. 스웨덴은 지난 1993년 세계 최초로 ‘직장 내 괴롭힘 조례’를 만들어 직장 내 괴롭힘의 범위와 정의, 구제 제도 등을 명시했다. 덴마크도 직장 내 폭력행위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 가이드라인을 지난 2012년에 만들어 배포했다. 같은 해 일본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직장 내 괴롭힘의 예방, 대처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가 인권침해임을 인식하고 사내 존중 문화를 형성해나가는 구성원간 노력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점규 직장갑질 119 운영위원은 “사람을 마치 하인처럼 취급하며 억압하고 강제로 일을 시켜 성과를 내는 시절은 이미 지났다”며 “억지로 일을 해봤자 창의적인 활동은 나오지 않는 것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지영 변호사도 “사업장마다 전수 조사를 실시해 직장 내 괴롭힘 대응 매뉴얼을 만들고 구제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위원회를 설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