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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내 ‘진보진영’ 주자 중 한 명이었던 엘리자베스 워런(사진) 상원의원이 당 대선 경선 레이스에서의 하차를 결정한 5일(현지시간) 양강 구도를 그리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는 물음에 답변을 피했다. 자신의 지역구인 메사추세츠주(州) 케임브리지의 자택 앞에서 취재진을 만난 워런 의원은 거듭된 질문에도 “지금 말할 사안은 아니다” “오늘은 밝히지 않을 것” 등의 단호한 표현을 써가며 극구 답변을 거부했다.
이념적으로 훨씬 가까운 샌더스를 지지할 공산이 크다는 예측과 달리, 신중한 모습을 내비친 이유는 무엇일까.
◇바이든-샌더스, 워런 지지층 양분할 듯
그동안 미 언론은 물론 정가에서도 워런과 샌더스를 ‘진보진영 주자들’로 묶었다. 전 국민 의료보험·부유세 도입 등 내세웠던 공약들은 엇비슷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두 사람은 정치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친구였으며, 이념적 우방이었다“고 했다. 당연히 지지층도 겹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지난 2~3일 ‘모닝컨설팅’ 여론조사를 보면, 워런이 중도하차할 경우를 가정해 던진 질문에서 워런 지지자들의 43%는 샌더스를, 36%는 바이든을 지지하겠다고 답변한 것이다. 샌더스가 크게 이득을 볼 것이라는 예측과 다른 결과다. ‘중도진영 주자’였던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의 하차로 바이든이 큰 이득을 본 것에 비해, 초라한 수준이다. 같은 조사에서 블룸버그 지지자들의 48%는 바이든을 지지하겠다고 답해, 샌더스를 지지하겠다(25%)는 답변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워런과 샌더스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 경선 과정에서 많이 틀어졌다고 한다.
지난 1월 TV토론 당시 워런의 폭로가 대표적이다. 워런은 토론에서 과거 샌더스 의원이 ‘여성은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고, 이에 샌더스는 전면 부인했었다. 당시 토론 이후에도 두 사람이 토론장에 남아 설전을 이어간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두고 미 의회전문매체 더 힐은 “그간 두 주자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다”고 표현했다.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워런 의원이 ‘무소속’인 샌더스를 지지한다면 당내 일각에서 일종의 ‘해당 행위’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로 2016년 대선 경선 당시에도 워런은 샌더스가 아닌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일각에선 워런이 이번 경선에서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만만찮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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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의 하차는 민주당이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지난해 5월만 해도, 민주당원들이 그리는 대선후보의 모습은 ‘노인·백인·남성’이 아닌 ‘젊음·유색인종·여성’이었다. ‘퓨 리서치센터’ 여론조사(5675명·표본오차 ±3.0%포인트) 결과를 보면 민주당원들은 최고의 대선후보의 모습으로 50대, 흑인, 여성을 꼽았었다.
이에 발맞춘 듯 민주당 대선후보군은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50대 흑인 여성), 훌리안 카스트로 전 주택도시개발 장관(멕시코 이민3세), 앤드류 양 사업가(대만계) 등 나이, 인종, 성별을 뛰어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 가운데 미 원주민 인디언 혈통이자, 여성 정치인인 워런은 선두주자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이겨야 한다는 잠재력, 즉 ‘당선가능성’(electability)이라는 ‘문턱’을 뛰어넘지 못한 셈이다.
결국, 이제 민주당은 고령의 ‘백인 후보’ 2명만 남겼다.
이날 워런이 취재진에게 남긴 이 마지막 언급은 미 정가에서 ‘유리 천장’을 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유세과정에서 만난 소녀들과의 ‘(여성 대통령 당선) 약속’을 4년 더 미뤄야 한다는 게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이다.”
그동안 워런은 소녀들을 만날 때마다 무릎을 꿇어 눈을 맞추고선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야. 네 이름은 뭐니? 나는 ‘여자 아이들이라면 해야 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해”라고 말한 뒤, 새끼손가락을 걸고 승리를 약속해왔다.
미 역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에 오른 낸시 펠로시는 워런의 하차를 두고 “유리 천장이 아니라 대리석 천장”이라고 언급하며 아쉬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