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화를 총괄하는 마이크 폼페이오(사진 위) 미국 국무장관이 한·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0일(현지시간) 대북(對北) 제재 문제에 대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이날 워싱턴D.C.에서 열린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회 청문회 자리에서다.
불과 하루 전날(9일)까지만 해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독재자’ ‘폭군’으로 규정하며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 이른바 ‘FFVD’가 이뤄질 때까지 제재를 통한 최대한의 경제적 압박을 계속하겠다고 밝힌 것과 비교하면 확연한 온도차가 느껴진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미 협상 재개를 위한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모든’ 대신 ‘핵심’ 제재 표현 ‘주목’
폼페이오 장관의 ‘여지’ 언급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약속을 입증할 때까지 어떠한 제재도 해제돼선 안 된다는 데 동의하느냐’는 코리 가드너(공화·콜로라도) 상원의원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폼페이오 장관은 답변과정에서 ‘여지’라는 단어를 두 차례 반복했는데, 한번은 ‘스페이스(space)’로, 다른 한번은 ‘룸(room)’으로 표현했다.
그는 “때로는 우리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룬다면 그것이 (목표를) 달성하기에 올바른 일이 된다고 여겨지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며 ‘실질적인 진전’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이뤄진다면, 완전한 비핵화 전이라도 부분적인 제재 완화 또는 해제가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여지’의 예로 ‘비자 문제’를 꼽은 부분도 주목된다. 이를 두고 한·미 외교가에선 북한의 해외 파견 노동자에 대한 비자 제한 완화나 북한 국적자의 여행금지와 관련된 대북제재 해제 등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폼페이오 장관의 언급 중 눈에 띄는 대목은 또 있었다. “비핵화에 대한 검증이 완료될 때까지 이행 체제 즉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핵심 결의는 유지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부분이다. 모든 결의가 아닌, ‘핵심’ 결의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모든 제재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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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제재 문제에 대한 폼페이오 장관의 ‘유연한’ 표현이 주목받는 건 문재인(왼쪽) 대통령과 도널드(오른쪽) 트럼프 대통령 간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불과 하루 앞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간 비핵화 정의와 구체적인 이행방식을 둘러싼 북·미 간 갈등은 첨예했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진 이후 제재완화 등 보상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일괄타결 식 빅딜해법을 선호한 반면, 북한은 비핵화 단계별로 상응하는 제재완화 조치 등을 촉구하는 단계적 해법을 주장해왔다.
이런 가운데 폼페이오 장관의 언급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교감 아래 나온 것이라면 북·미 간 간극은 더욱 좁혀질 여지가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이 문 대통령의 이른바 ‘굿 이너프 딜’(충분히 괜찮은 거래)이나 ‘조기 수확’(early harvest) 방식을 전격 수용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대북제재에 대한 유연성을 재차 확인한다면 문 대통령으로선 향후 이어질 북한과의 대화에서 비핵화 로드맵에 대한 포괄적 합의를 설득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일각에선 북한의 오판을 사전 차단하려는 전략적 발언이라는 관측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하루 전인 10일 주재한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간부들에게 “고도의 책임성과 창발성,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해 우리 당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철저히 관철해나가야 한다”는 발언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