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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부터 가평까지 일일이 설득했는데 '종점' 하남서.. 속 타는 한전

김형욱 기자I 2024.08.22 06:05:00

[위기의 수도권 전력망]②
76개 마을 90% 설득했는데 하남 반대 막혀
동서울변전소 증설 반대 시위
280㎞ 송전선 계획 차질
감일신도시 개발로 입주한 주민들
"이사 오자마자 증설이라니 안돼"
주민 요구대로 이전 땐 10년 지연
"중재 위한 협의체 마련 서둘러야"

[하남=이데일리 김형욱 황영민 기자] ‘주민, 어린이 생명을 인질로 증설 흥정이 웬말이냐.’

지난 19일 오후 하남시청 앞에선 비장한 표정의 50여명의 감일신도시 주민이 찜통더위 속에서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의 동서울변전소 증설 반대 시위를 펼쳤다. 이들은 이날 1만2000여명의 서명을 담은 반대 성명를 하남시 측에 전달했다. 총 4만여명 주민의 약 30%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참에 변전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며 의기투합한 주민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연일 반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신도시 곳곳엔 반대 구호를 담은 현수막이 내걸렸다. 하남시가 21일 한전이 3월 낸 사업 신청을 불허한 배경이다.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이로써 정부와 한전이 수도권 전력 부족 전망에 맞춰 2026년까지 경북 울진에서 신가평을 거쳐 이곳에 오는 총 길이 280㎞의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HVDC) 송전선로 건설 전체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주민의 요구대로 변전소를 이전하려면 10년 이상이 걸리고, 법적 분쟁 끝에 한전이 승소하더라도 전례 상 3년은 걸린다. 늦어도 내년 2월에는 착공해야 기한 내 완공할 수 있는데, 현 시점에선 그 이전에 지역 주민과 하남시, 한전 모두가 만족할 만한 중재안이 나오기 어렵다.

◇이사 오자마자 변전소 증설이라니…거리로 나선 시민들

이곳 주민 대부분은 2020년 이후 감일신도시 개발과 함께 입주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새집에 이주하자마자 ‘혐오시설’로 분류되는 인근 변전소가 설비용량을 3.5배 늘리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계획을 알려오자 무더위를 뚫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곳은 특히 8세 이하 어린이 비중이 약 14%로 높기에 전력설비에 늘 뒤따르는 전자파 영향에 대한 체감 우려도 크다. 지난달 증설 반대 거리행진 땐 부모와 자녀가 함께 피켓을 들기도 했다.

오해가 문제를 키웠다. 한전은 지난해부터 주민자치회나 아파트 입주자 대표 등을 대상으로 이번 사업 설명회를 했으나 증설 내용은 잘 전달되지 않았다. 한전이 주민 반대 여론을 고려해 변전 설비를 모두 건물 안으로 집어넣는 옥내화를 함께 추진키로 했는데, 변전소 옥내화는 많은 주민의 바람이었던 만큼 이 부분만 알려진 것이다. 이를 뒤늦게 인지한 주민은 강하게 반발하며 지난달 초 한전의 설명회를 무산시키는 등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감일신도시 주민들로 이뤄진 동서울변전소 이전추진 및 증설 반대 비상대책위원회 50여명이 지난 19일 경기도 하남시청 앞에서 동서울변전소 증설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독자제공)
갈 길 바쁜 한전은 막판에 큰 걸림돌을 만나게 됐다. 앞선 수년간의 노력 끝에 발전소가 몰린 경북 울진에서 이곳 하남에 이르는 70여 마을 주민을 설득해가며 송전철탑 등 송전망 구축 사업을 추진해 왔고, 지난해 11월 울진에서 첫 삽까지 떴는데, 이곳 변전소 증설이 막히며 전체 사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전례 상 법적 분쟁 시 한전 승소가 유력하다. 더욱이 이번 건은 기존 변전소 내 증설이기에 승인 대상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북당진변전소 법정 분쟁 사례를 고려하면 행정심판부터 대법 판결까지 3년이 걸린다.

◇큰돈 들여 지중화·옥내화도 추진하는데…속 타는 한전

한전의 어려움은 크다. 인구 밀집으로 주민 수용성 확보가 어려운 점을 고려해 신가평(양평)~동서울(하남) 구간 대부분은 송전망을 땅 밑으로 까는 지중화 작업을 결정했다. 지중선로는 송전철탑 대비 건설비용이 10배다. 이곳 변전소 역시 옥내화를 병행하기 위해 훨씬 더 큰 비용을 들이기로 했다. 변전소 전면 옥내화는 세계 최초다. 총사업비 6996억원 중 건물 건설 비용만 1500억원이다.

한전 HVDC건설본부 관계자는 “많은 주민이 전자파를 우려하는데, HVDC 자체가 전자파 발생 우려를 고려해 전자파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고 주민 요구대로 변전소 옥내화로 도시 미관도 좋아질 수 있는 상황”이라며 “주민 오해를 줄이려 설명회를 열고 협의를 해보려도 현 시점에선 만남 자체가 쉽지 않아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대안도 마땅치 않다. 주민 사이에서 2028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인근에 조성 중인 교산신도시로 변전소를 이전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변전소 이전에는 10년 이상이 걸릴 뿐 아니라 수천억원이 들어가는 변전소 이전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도 정해야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주민 일각에선 현실 불가론 등이 나오지만 증설 반대 대세론에 묻히고 있다.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이 같은 갈등은 비단 동서울변전소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력망은 우리 삶의 필수 요소이지만, 송·변전선로가 들어서는 곳마다 주민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이어진 밀양 송전탑 갈등이 대표적이다. 한전은 이곳 동해안~수도권 HVDC 280㎞를 잇고자 수년에 걸쳐 76개 마을과 일일이 협의에 나서 69곳과 합의를 마쳤으나 이곳과 홍천지역 7개 마을 주민과의 협의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송전망이 없어서 쓰지 못하는 발전소가 계속 늘어나는 심각한 상황”이라며 “이해관계자 중재를 원활히 할 수 있는 사회적 타협 협의체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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