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울리는 CB 리픽싱]손해봐도 속수무책…"전환율 70% 제한 의무화해야"

박태진 기자I 2019.06.05 05:15:00

개인투자자, 주가하락·주식희석에 재산 피해 호소
“규정 있지만 사실상 기업 마음대로 조정 가능”
기업, 이자율·콜옵션 조항으로 이익 챙긴다는 지적
“당국 의지 있으면 제한 가능” vs “건마다 전환율 달라”

[그래픽=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이데일리 박태진 기자] 지난달 20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전환가액의 전환율을 70%까지로 의무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전환가액 조정(리픽싱)을 액면가까지 낮추는 회사들이 늘고 있어서 기존 주주들의 손해가 막심하다는 게 골자다. 현재까지 이 청원에는 총 239명이 동의 의견을 남긴 상태다.

CB 리픽싱은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거리였지만, 최근 CB발행이 늘어난 가운데 증시도 지지부진하면서 전환가액이 조정되는 사례가 증가하자 개인 투자자들의 불만이 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모양새다. 전환가액을 조정할 수 있는 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도한 리픽싱 꼼수 가능…주주가치 희석에 소액 주주 피해

CB는 기업 입장에서는 유용한 자금조달 수단이다.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보다 낮은 이율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규모가 작은 중소·중견기업들이 주로 활용한다. 투자자 입장에서 CB는 이자를 받다가 주가가 상승하면 미리 정한 전환가로 전환해 추가 이익을 거둘 수 있어 매력적인 투자상품이다. 예컨대 한 기업이 1년 만기 CB를 발행하면서 전환사채 만기보장 수익률 8%, 전환가격 1만원으로 정했다면 향후 1년 동안 이 회사 주가가 1만원에 못 미칠 경우 투자자는 만기까지 보유했다가 8%의 이자만 받으면 된다. 반면 이 기업 주가가 올라 2만원이 됐다면 주당 1만원에 이르는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다.

이같은 매력 때문에 코스닥벤처펀드 등을 운용하는 기관투자자 뿐 아니라 ‘큰 손’ 개인투자자들도 활발하게 투자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CB에 억 단위로 투자해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는 글을 종종 볼 수 있을 정도다.

코스닥상장사 관계자는 “일반 상장사 주식을 가지고 있으면 수익률이 마이너스가 될 수가 있는데, CB는 원금보장이 되다 보니 훨씬 안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며 “일부 투자자들은 지인에게 양·수도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과도한 리픽싱이다. 리픽싱은 주가 하락에 따른 CB 투자자 손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주가가 떨어지면 전환가도 낮게 조정해 더 싼 가격에 주식을 전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제5-23조)에는 전환가액을 낮출 때 최초 발행가의 70%에 해당하는 가액으로 결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규정과 달리 실제 기업들이 전환가액을 조정할 때에는 제각각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각 사채를 발행할 때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계약서마다, 회차마다 내용이 모두 다르다”면서 “리픽싱 한도가 액면가나 70%까지인 것도 있어서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고 털어놨다. 리픽싱을 할 때마다 액면가까지 낮출 수 있다는 조항을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리픽싱을 할수록 CB 투자자의 이익은 커지지만 반대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소액 주주들은 전환물량이 늘어날 경우 주주가치가 희석돼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왕왕 있다. 악용할 경우 처벌할 수 있는 조항도 없어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커지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크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CB를 발행하고 나서 온갖 악재를 내팽개친 다음 주가가 급락한 후 리픽싱을 하는 경우도 있다”며 “이처럼 주식수를 많이 전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다음 투자자 대상 기업 홍보활동(IR)을 열심히 해서 주가를 올리면 회사의 이익이 더 커지게 되면서 오너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전환율 한도 강화해야…당국 의지 필요

이에 따라 금융투자업계에서도 리픽싱 전환율 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업에서 리픽싱을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에 전환율 한도 제한을 좀 더 강화할 필요가 았다”며 “정책 당국의 의지만 있으면 리픽싱 전환율 한도를 80%로 정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리픽싱 한도를 정하기보다 악용 사례에 대해 금융감독당국이 철저히 모니터링하고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부장은 “전환율은 CB에 투자하는 사람들과 기업이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기는 어렵다”며 “법이라는 것은 큰 틀에서 정하는 것이고, 세부적인 사항은 계약서를 통해 정하는 것인데 법을 무조건 70%로 제한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설명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CB 발행과 관련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순간에 주가는 보통 지분 희석의 효과 등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에 리픽싱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며 “다만 불법적으로 악용하고 있다면 금융당국이 개별사안으로 접근해 처벌을 내리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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