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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대기업 대관업무 담당자의 고뇌 "전화나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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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기자I 2016.08.01 06:30:00

어렵사리 공무원과 약속 잡았는데
''모신'' 상대방은 된장찌개 주문하고
내가 고기 4인분 시켜 나눠야 하나

[이데일리 김혜미 임현영 강경훈 기자] 나는 A대기업의 대관(對官) 업무 담당자다. 엔지니어 출신인 나는 본래 제품 개발과 영업부서에서만 있다가 다른 업무도 잠시 해보라는 인사팀의 약속을 받고 지난해부터 대관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당분간 후임은 안 올 것 같다. 바로 헌법재판소의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따른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 합헌 결정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내 보직 순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설명하려면 좀 길다. 우리 회사는 해외 수출비중이 매우 높은 편인데 최근에 중국에서 자국기업 보호를 위해 수출 요건을 까다롭게 하거나 승인을 미루는 등의 흐름을 보이고 있어 산업통상자원부나 외교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 언론사 종사자 등을 대상으로 적용되는 김영란법 항목 중에 ‘원활한 직무수행이나 사교를 위해 제공 가능한 음식 3만원·선물 5만원·경조사비 10만원’ 항목은 다소 난감하다.

‘밥값 각자 내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할 수 있지만 밥값은 우리에게 그저 단순한 ‘3만원’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가 기업과 관련한 어떤 법안을 마련할 때나 해외에서 홀로 해결하기 힘든 난제에 부딪혔을 때 협조를 요청하려면 단순히 전화만으로는 안된다.

실제로 기업체 담당자가 공무원을 따로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번에는 중국 수출품 승인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려고 임원을 따라 두 시간 걸려 정부세종청사를 갔다. 둘이서 로비에서만 서너 시간을 기다렸다. 오후에 시간이 날 것 같다던 담당부서 과장이 “지금 회의 중이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나오질 않았다. 과장은 한참 뒤 나와서는 5분 정도 이야기를 듣더니 “알았다. 일단 더 급한 용무가 있으니 나중에 다시 보자”며 사무실로 올라가버렸다.

그나마도 임원이니까 이 정도지 차장인 나는 전화도 어렵다. 청사로 전화를 걸면 이제 막 행정고시에 합격해 업무 파악도 제대로 안 된 20대 후반의 5급 사무관이 “내게 말하라”며 여지를 주지 않고 잘라내는 일도 자주 있다. 전무 이상은 돼야 그나마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인데 바쁘다며 좀처럼 시간을 내주지 않는 공무원을 시끌벅적한 김치찌개집으로 불러내 기업의 입장을 설명하긴 어려운 일 아닌가. 조금 좋은 식당에 가서 각자 돈을 낸다면 ‘굳이 왜 기업의 입장을 들으려고 내가 돈을 내야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공무원들이 아예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기업과의 접촉을 되도록 피할 것 같다.

그러다보니 오래도록 대관 업무를 맡아 온 사람들의 경우는 생각지 못하게 김영란법이 몸값을 올려주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쌓아둔 인맥들이 있어서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접촉이 잘 되는 편이기 때문이다. 업무를 맡은 지 1년도 채 안된 나 역시 완전한 초짜보다는 낫다는 이유로 업무가 순환되지 않을 것 같다. 일부 기업에서는 대관 업무를 아웃소싱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모든 기업들이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잘 정착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일전에 대관 업무 담당자들끼리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비싼 음식점에 가서 상대는 된장찌개를 시키고 내가 고기 4인분을 시켜 나눠먹는 방법 등이 농담처럼 흘러나왔다. 영수증에 각자 시킨 음식이 명시된다면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고위직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든가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안가(安家)’ 형태가 출현할 것이란 예상도 나왔다.

최근에 한 외국계 기업 담당자를 만났는데 미팅이 필요할 때는 사전에 약속을 잡은 뒤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바로 헤어지는 게 맞는 것 아니냐며 우리를 도로 이상하게 봤다. 그래, 우리도 김영란법이 제발 편법없이 그렇게 정착됐으면 좋겠다. 우리라고 ‘저녁이 있는 삶’,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절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이 기사는 다수의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특정 기업이나 부처,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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