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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는 1916년 소록도자혜의원(국립소록도병원 전신)이 들어선 이후 한센인의 집단 생활시설이 됐다. 한때 6254명(1947년)에 달했던 한센인은 현재 566명으로 줄었으나 여전히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센인 생활시설이다.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지만 섬 곳곳에는 한센인의 ‘한(恨)’이 배어 있다.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질환을 한센병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문둥병, 나병 등으로 비하해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센병으로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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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들의 하루는 교회 새벽 미사시간인 오전 3시45분에 시작한다. 고령의 한센인이 많아 대부분은 전동휠체어를 이용해 이동한다. 새벽예배에는 소록도 5개 교회 통틀어 약 150명이 참석한다. 예배에 참석한 한 한센인은 “잠을 못 잘 정도로 몸이 아픈 한센인 중에서는 아예 자정부터 교회에 나와 새벽예배를 기다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소록도 내에는 모두 5개(중앙·신성·동성·남성·북성교회)의 교회가 있다. 하지만 목사가 3명뿐이라 동시에 예배를 할 수 없어 1부와 2부로 나눈다. 중앙·신성·동성교회가 오전 3시45분에 1부 새벽예배를 하고 이후 4시30분께부터 남성·북성교회에서 2부 새벽예배가 진행된다. 일요일 예배도 1·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성당 아침미사는 오전 7시에 시작해 8시30분께에 마친다. 작은 섬에 교회가 5곳이나 되는 이유는 이곳 주민들이 마을단위로 정착해 사는데다 이동이 쉽지 않은 때문이다.
소록도 한센인에게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소록도 거주 566명의 한센인 중 약 400명은 교회에, 나머지는 성당에 다닌다. 장인심(78·여)씨는 “1952년 소록도에 들어온 후 자살하려 했는데 그날 목사님 설교가 ‘목숨은 소중하다’는 내용이었다”며 “이후로 63년째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웃었다. 안용일 국립소록도병원 원생자치회장은 “종교가 없었던 사람도 소록도에 오면 대부분 종교가 생긴다”고 말했다.
소록도 내 식사방법은 크게 3가지다. 병원에 입원한 한센인은 병원식을 먹고 나머지는 녹생리·새마을·중앙리에 있는 식당을 이용하거나 직접 재료를 받아 집에서 해먹는다. 거동이 불편한 일부 한센인들에게는 도시락을 배달해 먹는다. 직접 밥을 해먹는 한센인에게는 매주 식재료를 공급하고 쌀은 하루 소비량을 470g으로 계산해 한 달분을 배급한다.
소록도 거주 한센인들의 평균연령은 74세. 한해에만 40~50명이 세상을 떠난다. 소록도 내에는 화장시설 있어 죽은 이의 시신을 섬에서 화장할 수 있다. 화장한 유골은 유가족이 찾아가지 않는 경우 모두 소록도 내 만령당(萬靈堂)에 안치한다. 안 자치회장은 “10년이 지나도 찾아가지 않는 유골은 만령당 뒤 봉분에 묻는다”며 “대부분 가족과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온 분들어서 유골을 찾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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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소록도에서 한센인이 살기 시작한지 100년이 된다. 섬 곳곳에는 사회의 냉대와 핍박 속에 고생했던 한센인의 ‘한(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한센인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곳은 1935년에 만들어진 감금실(등록문화재 67호)이다. 일제가 만든 ‘조선나예방령’에 따라 소록도에 격리 수용된 한센인은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감금실에 끌려가 금식이나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감금이 끝난 후에는 강제단종수술까지 받았다. 감금실은 1973년 내부를 개조해 신체부자유 한센인을 위한 숙소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변기가 없는 감금실은 숙소로 개조하면서 원형이 변경된 것이다. 감금실 바로 옆에는 검시실(등록문화재 66호)이 있다.
소록도 중앙공원 안에는 구라탑(救癩塔), 다미안공적비, 한하운시비 등의 기념물이 있다. 구라탑은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병 원인균인 나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하단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은 1963년 국제캠프단이 오마도 간척공사를 도와 근로봉사를 하던 중 소록도 한센인들을 조속한 치유를 기원하며 세웠다.
관광객의 진입이 불가능한 생활지대에도 한센인의 유골을 모셔놓은 만령당(등록문화재 제114호), 구 순천교도소 소록도지소 여사동(등록문화재 469호), 소록도 자혜의원 본관(전남 문화재자료 238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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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년여에 걸친 물막이 공정이 80∼90% 가량 진척된 상황에서 당시 군사정부는 “나환자들과 함께 살 수 없다”고 간척사업을 반대하고 나선 뭍주민들의 민원에 굴복, 공사를 중단시켰다.
50년이 넘은 지금도 소록도 한센인은 당시를 떠올리면 몸서리를 친다. 장인심씨는 “남편이 오마도 건설대 소속으로 일했는데 정말 고생했다. 다치는 것은 예사고 죽는 사람들도 나왔다”며 “그렇게 고생했지만 간척지를 빼앗기면서 임금도 받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남재권(73)씨는 “소록도에서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남자는 다 공사에 동원됐다”며 “간척지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오마도 간척지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89년에야 비로소 완성돼 일반 주민들에게 분양됐다.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 올라가면 한센인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오마도 간척지가 한 눈에 보인다. 추모공원 한편에는 소록도 한센인을 그린 故(고)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중 한 문장이 쓰여져 있다.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