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5월물 가격은 이날 장중 한때 배럴당 19.92달러에 거래됐다. 전거래일 대비 6% 이상 폭락한 것이다. 이는 1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WTI 가격은 올해 초 배럴당 61.18달러(1월2일 기준)였다. 3개월만에 3분의 1토막난 셈이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브렌트유 5월물은 장중 배럴당 23.03달러까지 내렸다. 전거래일과 비교해 7% 넘게 떨어졌다. 2002년 11월 이후 17년여 만의 최저치다. 브렌트유 역시 연초 배럴당 66.25달러에서 40달러 넘게 폭락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최근 국제유가 폭락 사태를 2014~2015년 유가폭락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진단했다. 골드만삭스는 “코로나19로 석유수요 감소가 예상되는 가운데 벌어진 이번 상황은 2014년 가격전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통상 국제유가가 내리면 기업이나 가계의 비용이 줄어든다. 제품 가격을 낮춰 실질 구매력을 높이고, 더 많은 지출을 유도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등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도 끼친다.
실례로 2014~2015년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서 20달러선까지 폭락했을 때 세계 경제는 지속적인 회복기에 있었기에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석유 수요가 늘어나며 정유사 매출이 덩달아 늘었고, 항공 및 운송 업체들은 비용을 아낄수 있었다. 제품 가격이 하락하면서 소비자들은 지갑을 더 쉽게 열었다. 더 많이 여행을 다니고 더 많은 물건을 구매했다.
2014~2015년엔 사우디가 미국 셰일가스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가격경쟁을 벌인, 즉 공급 측면에서 기인한 유가 하락이기 때문이다. 산유국들의 감산합의로 유가를 지지하는 해결책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공급 과잉과 수요 부족이 복합적으로 유가를 끌어내리고 있다. 공급 측면에선 사우디와 러시아 간 감산합의 실패했고, 수요 측면에선 코로나19로 실물 경제가 크게 위축되면서 산유국 감산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다.
CNN은 “항공·크루즈 업계에서 예약이 잇따라 취소되고 고속도로는 텅텅 비어 있다. 공장들도 가동을 멈췄다”면서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가가 내려도 경제를 끌어올리는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사우디 등 석유 수출국들은 성장이 크게 침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②사우디-러시아 간 가격경쟁 격화…치킨게임 장기전
문제는 유가 하락 사태가 장기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CNBC는 전문가들을 인용, 가격경쟁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전했다. PVM오일어소시어츠의 스티븐 브레넉 애널리스트는 “사우디는 추가 생산 능력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갖고 있고 러시아는 장기전을 대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다음달 1일부터 하루 산유량을 최대 50만 배럴까지 더 증산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산유량은 현재 하루 1130만 배럴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원유 매출액 증가에 힘입어 1700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조성해둔 만큼, 장기간 유가하락을 감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제1부총리는 이날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유가 폭락을 유발한 것은 중동 국가들”이라며 증산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에 맞서 사우디 아람코는 내달 1일부터 하루 생산량을 970만 배럴에서 1300만 배럴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아람코의 지속가능한 원유생산 능력은 1200만배럴 수준으로 추정된다. 즉 하루 1300만배럴 생산은 사우디가 전략비축유까지 시장에 쏟아붓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사우디 역시 석유 생산 원가가 2.8달러에 불과하다며 유가 폭락에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외에도 아랍에미리트(UAE)가 추가로 500만배럴까지 늘릴 수 있다고 엄포를 놓는 등 국제유가 시장은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③美 에너지업계 “터질게 터졌다”…돈맥경화 우려
사우디와 러시아의 감산 합의로 가장 이득을 많이 봤던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 셰일가스기업들은 2016년 감산합의 이후 유가가 안정되자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미국 경제에서도 한 축을 차지하게 됐다. 댈러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셰일가스산업은 투자 붐이 일었던 2010년 전까지는 미국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하는 비중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이후 2019년까지 10년 동안 10%로 확대됐다.
하지만 ‘빚을 내’ 감행한 투자였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유가가 회복한 뒤 미국 에너지기업들이 발행한 전체 회사채중 투기등급(신용등급 BB 이하) 비중이 50%를 초과했다. 그런데 최근 이들 채권의 이자율이 급등하고 있다. 유가 하락으로 연쇄 파산 우려가 불거지자 투자자들이 내다 팔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회사들의 이자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부도 위험도 커지고 있다. CNN은 “부채로 허덕이는 소규모 석유회사들은 근로자들을 해고하고 파산신청도 고려해야 할 판”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회사채 시장의 불안이 에너지 산업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투기등급 바로 윗 등급인 투자등급(신용등급 BBB) 채권 금리도 미국 국채 금리와 3%포인트 이상 벌어졌다. 투자등급 회사들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정상적인 기업이더라도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 유동성 위기를 겪을 수 있다.
나아가 이들 회사채에 투자한 은행이나 펀드 등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자칫 금융시장 전반으로 리스크가 전이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미국 에너지기업이 발행한 채권들 중 약 1100억달러가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