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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乙이 乙 등치는 보이스피싱의 비극

노희준 기자I 2018.03.13 06:00:00
[이데일리 노희준 기자] “연 8%로 8700만원까지 빌려준다는 말에 그만, 없는 형편에 빌려서까지 보냈는데…”

전라도 광주에 사는 40대 회사원 A씨. 그는 서울 동작경찰서가 적발한 중국 보이스피싱 일당에 1000만원을 사기당했을 때를 떠올리다 말을 잇지 못했다.

급전이 필요해 캐피탈은 물론 대부업체에서까지 돈을 끌어다 썼던 A씨는 저금리에 큰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말에 혹해 주변에서 돈을 융통해 보이스피싱 일당에 넘겨줬다가 고스란히 날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들이었다. 이들은 “돈이 궁해서”, “장사가 안되서” 목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은행원으로 위장한 보이스피싱 일당의 사기행각에 속절없이 속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 등 금융회사로 위장해 돈을 빼돌리는 ‘대출빙자형’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62.5%는 40·50대다. 자녀 대학등록금, 사업자금 등으로 목돈이 필요한 이들이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의 주 타깃이라는 얘기다.

씁쓸한 것은 이들을 등치는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대부분 20~30대라는 점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거나 직장에서 쫓겨난 뒤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보이스피싱 사기에 뛰어든 이들이 적지 않다.

“석달이면 1억을 번다”는 모집책의 꼬임에 빠져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이번에 덜미가 잡힌 12명 중 9명이 20대, 나머지는 30대다.

가난한 취업준비생과 사회초년생들을 범죄행각에 끌어들여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또래들을 등치게 하는 진짜 ‘나쁜 놈’은 번번이 법망을 빠져나간다. 동작서가 검거한 이번 보이스피싱 일당에서도 조직의 우두머리 격인 중국총책은 빠져 있다.

중국에 은닉해 있는 ‘주범’은 경찰 수사가 잠잠해지면 또다시 큰 돈 벌 욕심에 눈 먼 이들을 꼬여내 사기행각을 벌일 것이다. 중국 수사당국과의 공조 강화는 물론 보이스피싱 아지트가 된 지역에 대해서는 직접 수사도 고려해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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