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리더⑮]"공주과 라고요? 일할 땐 머슴"

송이라 기자I 2012.07.18 08:00:00

문정숙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 겸 부원장보
"금융소비자 보호..공급자 아닌 소비자 중심돼야"

[글=이데일리 송이라 기자. 사진=권욱 기자]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아직 비주류다. 세상이 바뀌어도 출산과 육아 등 부담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데일리는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당당한 인적자원으로서 기여할 부문이 적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여성리더 30인에게 듣는다’ 를 연재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나의 길’을 도모해 성공한 여성 리더가 풀어내는 삶의 지혜를 나누고자 한다. <편집자>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사모님. 문정숙(56·사진)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 겸 부원장보의 첫인상이었다. 남성 위주의 문화가 강한 금융권, 그 중에서도 금감원 내 유일한 여성 임원이라는 타이틀에 여장부의 이미지를 상상했던 기자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7월의 무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4일. 문 처장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 겉모습만 보고는 공주과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제가 일하는걸 본 사람들은 머슴과라고 하죠. 일에 있어서 만큼은 늘 열정적이고 부지런하게 뛰어다니는 완벽주의자입니다.”


문 처장은 자신의 이력서를 가져왔다. 스무장이 넘는 이력서에는 그간의 경력과 수상내역, 논문 등 소비자 전문가로서 경험한 지난 30년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기획예산처·공정거래위원회 자문위원 등 정부부처에서부터 우리금융·한국전력공사 사외이사 등 기업, 한국소비문화학회·한국소비자정책교육학회 회장 등 학계까지 그녀의 활동 영역엔 제한이 없었다.

이 정도 이력이면 이젠 편하게 살 법도 한데 그녀는 여전히 소비자 관련 조찬모임에 참석하고, 퇴근 후엔 공부방 모임에도 간다. 소비자경제를 향한 열정으로 그녀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듬어가고 있었다.

문 처장은 70년대 후반 숙명여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데모로 인해 수업이 있던 날을 손꼽아야 할 정도로 공부에 목말라 있었다. 미래의 여성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어떤 전공이 좋을까 고민하던 그녀는 ‘소비자경제학’을 선택하고 과감히 미국행에 올랐다. 당시 20대 후반의 여성이 결혼도 하지 않고 유학을 간다는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후회없이 공부하고 싶었고,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물론 문득 불안함과 두려움이 찾아왔죠. 특히 당시 한국에선 소비자경제라는 학문 자체가 생소했어요. 과연 내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습니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소비자경제 전문 교수를 찾아 무작정 비행기를 탔습니다.”

1984년 12월.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 캔자스에서 시카고까지 날아간 그녀는 결국 당시 시카고대학 교수였던 게리 베커(Gary Stanley Becker)를 만났다. 동양에서 온 여학생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준 베커 교수와 30분간의 면담을 통해 문 처장은 소비자경제 분야에 대한 확신을 갖고 돌아왔다.

훗날 상담을 해줬던 교수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그를 통해 용기를 얻었던 20대의 당당한 여학생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금융소비자보호처 초대 처장이라는 타이틀로 그녀를 이끌었다.

“자신이 여성 혹은 남성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을 긋지 말고, 일 중심적으로 조직과 조화롭게 소통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여성이 아직까지는 정보공유 문제나 조직생활에 있어 소수지만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서 주요 역할을 차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금감원에 합류한지 이제 2년 반째.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도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집단에서 외부 출신 여성 임원이 느끼는 외로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미용실에 가면 5만원짜리 파마를 하고, 옷은 아울렛 매장에서 50% 할인받아 산다”는 그녀의 솔직 담백함은 조직 내에서도 부하 직원들로부터 ‘가장 나이스한 상사’라는 평가를 받는 원동력이 됐다.

“1987년에 교수가 됐는데 그때부터 어딜가나 여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지금 있는 조직에서도 여성 임원은 저 혼자고요. 이젠 익숙합니다. 되레 솔직하고 시원한 아줌마 파워로 회의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합니다.(웃음)”

인터뷰 도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이어간 상대방은 다름 아닌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의 영어 선생님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금융소비자보호처를 이끄는 책임자였지만, 한 편으로는 아들의 학업을 걱정하는 평범한 엄마였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자식교육은 적당히 방치하자는게 지론”이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쉽고 친절한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만드는게 목표입니다. 그동안 소비자, 특히 금융소비자 보호는 사전적 보호가 아닌 사후해결이라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이제는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소비자보호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빛은 다시 단호해졌다. 신설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맡은지 2개월. 소비자보호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면서 그녀의 어깨도 더욱 무거워지는 것 같다.

◇문정숙 금감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은

1955년생으로 숙명여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가정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86년 미국 캔자스 대학에서 소비자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던 2009년 금감원 소비자서비스본부장을 맡았다. ‘소비자권익향상을 위한 민관협력체계 강화방안 연구’ 및 ‘소비자보호종합계획’ 등 소비자보호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2002년 대통령직속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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