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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확대경]재벌에겐 부족한 벤처의 기업가 정신

김현아 기자I 2016.06.14 03:43:27
[이데일리 김현아 기자] 우리나라만큼 기업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은 나라가 있을까. 조선이나 해운 같은 기존 주력 산업이 꽉 막혔으니 기술융합과 규제혁신으로 신산업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수긍하는 사람들도 내심 ‘규제를 확 풀면 기업에만, 그것도 대기업에만 유리한 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가진다. 근로자인 나는 외면당한 채 오너들만 배불러지거나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드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부자라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넘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말을 사회악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베테랑’, ‘돈의 맛’ 같은 영화가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몇몇 못된 기업가(企業家)들이 뿌린 씨가 발단이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 그는 장녀(30), 차녀(28)와 함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매각한 혐의를 받고 있다. 4월 22일 자율협약 신청을 발표하기 직전인 6일~20일 사이에 보유 중이던 한진해운 주식 97만 주를 27억 가량에 전량 매각했다. ‘기업은 망해도 오너는 산다’라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회삿돈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압수수색 당한 롯데그룹도 마찬가지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 죄의 무게를 언급하기는 시기상조다. 하지만 지난해 불거진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형제가 아버지 재산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다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됐으니 이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는 없다. 장남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측의 내부 제보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이상한 기업가들만 있는 건 아니다. 세상을 이롭게 바꾸는 건 정치가 아니라 기업이라고 외치는 기업가(起業家)들도 있다. 현상유지나 가업 승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뭔가 세상에 이로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네이버의 이해진 의장은 국내 기업 최초로 인수합병(M&A) 없이 해외에 자회사(라인)를 세워 미국과 일본 증시에 상장시키는 업적을 이뤘다. 국내 기업이 해외 자회사를 성장시켜 두 개 국가에 한 번에 상장시킨 것은 처음이다. 기업은행이나 LG필립스LCD, 금호타이어, 롯데쇼핑 등이 자회사를 외국에 상장시킨 사례는 있지만, 순수 한국 자본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한국 인터넷 기업의 위상을 높인 일이다. 라인의 기업공개는 야후가 지배했던 일본의 인터넷 검색 시장에 진입하려고 2000년 네이버재팬을 만들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끈기와 패기 덕분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상장 시 라인의 기업 가치를 6000억엔(약 6조5500억원)으로 추정했다.

치과 의사를 때려치우고 나와 간편송금 서비스 ‘토스’를 만들어 누적다운로드 300만 건, 누적 송금액 6000억 원 돌파를 앞둔 비바리퍼블리카의 이승건 사장도 배울만한 기업가다. 그는 “인류 사회를 진보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기술혁신이고, 이를 지속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건 기업”이라며 “그래서 8번의 실패를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한 지 5년 만에 마침내 KTB네트워크, 실리콘밸리 기반의 굿워터캐피탈과 알토스벤처스, 퀄컴 등에서 265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청년실업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하지만 지난해 신설법인 수가 9만 개를 돌파하고 벤처투자 규모도 2조 원을 넘은 것은 희망의 빛을 준다.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됐던 산업들이 어려워지니 기존 기업들은 일자리를 줄일 수밖에 없지만, 크라우드펀딩이나 창조경제혁신센터를 기반으로 한 제2의 벤처붐이 조성되고 있다. 이곳에서 탄생하는 기업가들은 금수저로 태어난 선배들과는 확연히 다른 혁신의 키워드를 갖고 있다.

페이스북 이사회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겸 CEO가 경영에서 물러나면 과반수 지배를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정관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저커버그가 퇴사하거나 사망하면 그는 물론 가족이 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미래 CEO가 탄생했을 때 그의 권한을 확실히 보장해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참으로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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