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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역할은 명확하다. 문화예술인에게 공짜밥을 주는 게 아니다. 가장 좋은 복지는 예술인이 복지의 영역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처방을 뛰어넘어 예술인이 자립할 수 있는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만들어주는 데 집중하겠다.”
박계배(58)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대표는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지난 8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재단 사무실을 찾았을 때 인사를 나누자마자 현안을 꺼냈다. 인터뷰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박 대표의 발언에는 거침이 없었다. 문화예술계 현안에 대해 쉴 새 없이 ‘돌직구’를 날렸다.
▲“최고은 작가 희생 헛되지 말아야”
춥고 배고픈 예술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상대적 빈곤에 시달린다. 국내에서 예술인을 위한 ‘문화복지’라는 개념은 20여년 전인 문민정부 시절 처음 나왔다. 문화복지의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했지만 매번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2011년 1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던 최고은(1979∼2011) 작가의 가슴 아픈 죽음이었다. 전도유망했던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요절에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말자며 의기투합했다. 2011년 10월 국회에서 예술인복지법이 통과되고 2012년 11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됐다. 국가차원에서 꾸린 예술인복지를 전담하는 기관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박 대표는 심재찬 대표이사 사임 이후 1년간 공석으로 어려움을 겪던 재단의 구원투수로 나서 2014년 10월 취임 후 의욕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박 대표는 “최 작가의 죽음이 문화예술인들의 열악한 처지에 대한 담론의 장을 만들면서 ‘예술인복지재단’이라는 결실을 맺었다”며 “재단은 최 작가의 희생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어깨가 무겁다.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예술인 직업역량 강화 중점…원로예술인 지원도”
재단의 역점 분야는 예술인의 직업역량 강화다.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이 대표적이다. 기업·기관의 예술인 고용을 지원하고 이들이 해당 분야에서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종사토록 하겠다는 게 골자다. 단순한 생활지원이 아니라 창작지원에 무게를 둔 것이다. 사업이 안착하면 기업이 예술인을 자발적으로 고용, 상호 윈윈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
박 대표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은 편의점 알바나 전단지 배포 등 예술활동과 무관한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인에게 본업과 병행할 수 있는 양질의 부업을 연계해주는 것”이라며 “올해 40억원의 예산을 배정, 500여명의 예술인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내년에는 지원규모를 두 배로 확대, 1000명 이상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란다.
다만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은 수도권 편중이 심하고 사업참여의 전제조건인 예술인의 예술활동증명이 까다롭다는 것이 난제. 이와 관련해 박 대표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 참여가 가능한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한 인원은 전국 1만 8000여명으로 79%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몰려 있다”며 “문턱을 낮추고 세부기준을 다소 완화해 2년 이내에 5만명 정도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또 “예술활동증명사업을 지방에 적극 홍보, 수도권과 지방의 비율을 6대 4 정도로 개선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원로예술인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박 대표는 “수많은 원로예술인이 척박한 땅에서 예술혼을 불살라왔지만 사회적으로 잉여인간 취급을 받아왔다”며 “국가의 품격을 위해 평생 헌신해온 이들을 대우하는 데 재단이 적극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총사업비 20억원 규모로 1000명의 원로예술인에게 연간 200만원가량 지원하는 창작지원금의 규모를 꾸준히 늘려나간다는 방안이다.
▲“‘예술인만 특별히’가 아닌 공공역할로 지원해야”
다만 부족한 재원과 예술인복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걸림돌이다. 실제 재단의 각종 사업은 예산문제로 집행이 늦춰지고 있다. 박 대표는 “최근 수많은 예술인의 문의 및 항의 전화로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며 “재단이 올 초 공표한 각종 사업에 대한 조속한 예산지원으로 예술인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예술인복지가 특혜라는 지적과 관련해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왜 바닥이냐”고 반문하면서 “광복·분단·전쟁 이후 잘살기 위해 쉬지 않고 뛰면서 이성과 논리를 다루는 국민들의 좌뇌는 발달해온 대신 감성과 직관을 관장하는 우뇌는 찌그러졌다. 우뇌를 통해 행복을 느끼기 위해 예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왜 예술인만 특별히’가 아니라 예술인의 공공적 역할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인이 끊임없이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줘야 국민이 행복한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국민행복 위해 예술인 먼저 행복해져야”
공정한 예술환경 조성도 강조했다. 대표적인 게 연극·출판·만화·공연·대중예술 분야 등에서의 표준계약서 보급 확대다. 박 대표는 “표준계약서 작성은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이기 때문에 특히 영세한 제작자가 많은 순수예술분야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이런저런 사정을 서로 알아준다고 표준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10년, 20년 후에도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소 야박하게 보여도 패러다임을 바꾸려면 부실하고 무책임한 제작사는 퇴출시켜야 한다”면서 “예술인이 을이 아닌 갑의 입장에서 과감하게 몸값을 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예로 든 박 대표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가 왜 베짱이를 도와야 하느냐는 말도 있다. 하지만 베짱이의 노래는 유희가 아니라 노동”이라며 “예술인의 예술도 노동인 만큼 국민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노동하는 예술인이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고 마무리했다.
▲박계배 대표는 누구?
1977년 연극 ‘결혼’을 연출하며 데뷔, 30여년간 50여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문화예술행정에도 관심이 많아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샘터파랑새극장 극장장을 지냈고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등을 거친 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3기 위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 등을 맡았다. 특히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부당한 대관계약을 바로잡기 위해 갑을계약서를 폐지해 화제가 됐다. 문화예술분야의 현장과 경영을 두루 경험한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10월 선장 없이 표류하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수장으로 취임했다. 박 대표 취임 이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출근하는 예술인’을 모토로 내건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을 본 궤도에 올려놓아 문화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57년 충남 당진 출생으로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 주요 연출작으로는 연극 ‘라쇼몽’ ‘리타 길들이기’ ‘천년제국 1623년’ 등이 있다. 2008년 예총예술문화상 대상, 2010년 서울시 문화상, 2013년 대한민국연극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