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지난해 12월 31일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뒤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며 감격에 젖어 울먹였다. 하지만 평생 그를 무대와 TV에서 봐왔던 우리들이야 말로 연기로 인생을 가르쳐준 고인에게 더는 갚지 못할 큰 신세를 지고 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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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4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호적상으로는 1935년생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초등학교 시절 해방을 맞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이순재가 연기에 눈을 뜬 건 대학 시절이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당시 대학생들의 값싼 취미인 영화 보기에 빠졌고,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이순재는 이듬해 TV 드라마 ‘푸른지평선’으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알렸다. 그는 반세기 넘게 꾸준히 무대와 브라운관을 지키며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함께했다. TBC 전속 배우 시절에는 100편이 넘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순재’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은 1991년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였다. 당시 그가 맡았던 ‘대발이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전형이자, 한국 사회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얼굴이었다. 평균 시청률 59%를 기록했던 ‘국민 드라마’였다.
이순재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고인은 정치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드라마 ‘야망’,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연기 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96년 정계를 은퇴한 뒤 다양한 작품에 출연한 그는 2006년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간 보여준 딱딱하고 엄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괴팍하지만, 권위는 없는 한의원 원장을 연기했다. 친척들 앞에서 야한 동영상을 보는 모습이 들키는 에피소드로 ‘야동 순재’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덕분에 젊은 세대에게도 친숙한 이미지를 쌓을 수 있었다. 고인은 72세에 찍은 이 작품으로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 나영석 PD와 함께한 tvN ‘꽃보다 할배’로 또 한번 신드롬의 중심에 섰다. 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출연한 이순재는 짐을 번쩍 들고 좁은 골목을 헤쳐 나가는 모습으로 ‘직진 순재’, ‘국민 할배’ 애칭을 얻었다. 특히 왕성한 체력으로 불평 없이 촬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줘 젊은 시청자에게 ‘참 어른’ 평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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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엔 특히 연극 무대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몇 시간 동안 라이브로 연기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고 연극을 계속했다. 연극 무대로 돌아온 이순재는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등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87세이던 2021년 출연한 연극 ‘리어왕’에서는 백발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200분 동안 방대한 대사를 완벽 소화해 ‘87세 배우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연출가로 변신해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무대에 올리는 열정을 보여줬다.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후배 양성에도 힘썼던 고인은 “언제든 기회가 오면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드라마 ‘개소리’의 주연을 맡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무대에 섰으나 건강 이상으로 일부 공연 회차를 취소했다. 그는 평생 대중문화와 연극 발전에 힘써온 공로로 2016년 ‘제3회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지난 4월 ‘한국PD대상’ 배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건강 악화설이 확산했다.
고인에게 있어 연기는 생계의 기술이 아니라, 평생 갈고닦는 수양과 같았다. 이순재는 “연기란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아 모양을 내야 하는, 완성할 수 없는 보석”이라며 “배우는 맡은 배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이 말을 끝까지 지켜냈던 실천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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