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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끄덕끄덕]챗GPT가 인간처럼 사고한다는 착각

송길호 기자I 2023.06.15 06:15:00
[정덕현 문화평론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방송된 KBS의 대표적인 교양정보 프로그램이다. 그 날의 주제에 맞게 섭외된 전문가가 스튜디오에 출연해 건강에서부터 음식, 생활과학, 실생활경제 등 갖가지 생활정보를 알려준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효용성이 앞으로도 계속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만드는 일들이 최근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챗GPT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 때문이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물어보면 알아서 척척 답을 내주고, 나아가 복잡한 계산이든, 논문이나 에세이도 원하는 방식으로 대신 써주기도 한다. 이러니 굳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프로그램이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싶어진다. 챗GPT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학교에서는 이 챗GPT 때문에 이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막아야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한다. 시험에 챗GPT를 활용해서 답을 쓴 학생들에게 “0점 처리”를 하겠다고 경고하는 교수들이 있는 반면, 아예 이를 잘 활용해 시험을 치르고 그 활용방식까지 적어내라는 교수들도 있다.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도 있지만, 어차피 열린 챗GPT 시대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입장도 적지 않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가 놀라우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이나 음악, 미술처럼 인간의 고유영역이라고 여겨진 예술 분야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미술계에는 손이 아니라 말로 그림을 그리는 AI의 능력 앞에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나오고 있다. 몇몇 지시어를 말로 던져주는 것으로 알아서 그림을 그려주는 이 신세계는 그 자체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세돌이 알파고와 한바탕 대국을 펼쳤을 때, AI가 인간의 영역을 침탈한다고 해도 예술 같은 영역은 넘볼 수 없다고 했던 장담들은 이제 물음표로 채워지게 됐다. 차단막을 놓고 컴퓨터라는 사실을 숨긴 채 대화를 진행해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는 이른바 ‘튜링 테스트’가 말해주듯이, AI는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컴퓨터와 인간의 경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챗GPT 때문에 마치 AI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하는 경향도 생기고 있는데 여기에는 일종의 착시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빅데이터를 활용해 확률이 높은 추정치의 답을 내는 AI 기술은 이미 존재했지만, 챗GPT가 세상을 놀라게 한 건 그것이 ‘챗봇’ 즉 대화하고 답변하는 채팅 방식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포털에 검색어를 넣고 정보를 찾는 방식이 인간이 컴퓨터를 도구로 활용하는 접근방식으로서 컴퓨터에 인간같은 느낌을 주지 않지만, 질문하면 답을 내는 이 대화의 방식은 마치 ‘인간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건 인터페이스가 가져온 효과다. 어떻게 접근하게 하느냐에 따라 보다 더 직관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인터페이스.

생각해보면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서 인터페이스는 중요한 영역을 차지했다. 과거 PC통신 시절에 알 수 없는 컴퓨터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거기에 ‘DIR’ 같은 명령어를 쳐 넣던 MS-DOS 방식은 전혀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제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컴퓨터의 대혁명을 가져온 건 윈도우라는 새로운 운영체제가 제공한 인터페이스였다. 여러 개의 창을 띄워놓고 클릭으로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이 인터페이스는 ‘창’이라는 개념으로 컴퓨터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이처럼 사람이 일상에서 무언가를 대하는 방식을 차용한 인터페이스의 문제는 실상은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보다 친숙하게 접근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보다 높은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챗GPT가 채팅 방식을 가져와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은 인터페이스를 통해 마치 ‘인간 같다’는 과몰입을 일으키는 과정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SF 영화 <그녀(her)>를 통해 다뤄진 바 있다. 음성으로만 존재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며 점점 빠져들다 결국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챗봇 AI가 진화해 고도화하게 되면 발생할 수 있는 딜레마를 그리고 있다. 육체가 없이 음성만으로도 사랑의 감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 영화는, 결국 인간만 가능하다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점점 더 깊게 사만다에게 빠져드는 테오도르는 그러나 이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실체를 마주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 운영체제는 진화를 위해 더 많은 인간들(데이터들)과 교류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 무려 8316명과 대화를 하고 있었고 그 중 641명과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르의 절망은 사랑은 대체불가능하다는 우리의 믿음에서 비롯한다. 결국 테오도르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과몰입’에 의한 착시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과몰입과 착시의 관점으로 다시 챗GPT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이 새로운 기술을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그 실체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챗GPT는 물론 지금까지와는 달리 훨씬 더 인간처럼 우리가 대할 수 있는 진화된 인터페이스와 기능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결코 인간처럼 사고하는 것은 아니다. 빅데이터들을 질문의 요구에 보다 근접한 확률로 모아 전해주지만 그 답들이 인간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인터페이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다. 과몰입은 때론 있는 그대로를 보기보다는,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만드는 경향을 만든다. 상용화하는 과정에서 인터페이스를 통해 실체가 아닌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만드는 방식으로 ‘인간 같은’ AI의 서비스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것은 또한 편리한 접근성을 만들 테지만, 그럴 때마다 과몰입이 만드는 착시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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