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웅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은 12일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이데일리와 만나 “새로운 장소를 얘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유족이 희망하는 곳은 바로 이곳”이라며 이같이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태원 참사’ 100일이던 지난 4일 서울광장에 기습적으로 설치된 분향소를 놓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유족과 시민단체 측은 다른 추모공간을 이날 오후 1시까지 제안해달라는 서울시의 요청을 거부했다. 서울시는 계획대로 오는 15일 분향소를 철거하겠다는 계획으로 양측은 입장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사회적 참사가 반복될 때마다 추모공간 마련을 놓고 갈등 양상이 지속하고 있어 ‘운용의 묘’를 살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과 원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억의 공간’을 마련해 또 다른 참사를 예방할 수 있는 사회 문화를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제언에 힘이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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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분향소에는 이날 이른 아침부터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주말을 맞아 나들이 나온 시민들은 물론 전날 밤 추모 문화제에 참석한 이들도 다시 방문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김지현(44)씨는 이날 분향소 앞에서 3000배를 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김씨는 “모두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데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며 “잘못을 그냥 두고 방치한 것이 저의 죄라고 생각돼 하염없이 절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참사 당일 우연히 방문한 이태원에서 구조에 나섰다는 곽학종(54)씨는 “서울시에서 분향소를 철거한다는데 맞서다 유족들이 사고가 날까 걱정돼 혹시라도 일 있으면 나서서 막으려고 준비하려고 왔다”며 “분향소는 시민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추모객들은 참사 초기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와 달리 유족이 직접 나서 설치했고, 영정과 위패가 함께 있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7세 두 아들과 함께 온 김모(41)씨는 “지난해 분향소에는 영정이 없어서 조문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찾지 않았다”며 “영정이 있는 상태로 분향소가 설치됐다는 말에 찾게 됐다”고 말했다. 신모(65)씨도 “작년 분향소에 영정도 없어서 일부러 찾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종시에서 올라온 50대 김모씨는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응해서 정치적 의도 없이 순수하게 계속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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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과 추모객의 바람과 달리 서울시는 계획대로 오는 15일 오후 1시 이후 행정대집행을 거쳐 서울광장 분향소를 철거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유족 측이 응답하지 않았고 이미 두 차례 계고장을 보내 강제집행 요건도 성립한다”고 했다. 앞서 서울시는 두 차례에 걸쳐 분향소를 자진 철거하라는 내용의 계고장을 보냈다. 지난 7일에는 유족이 선호하는 대안적 추모공간을 이날 오후 1시까지 제안해달라고 요청했다.
분향소 철거 등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경력지원에 나선 경찰은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분향소 인근 파출소 관계자는 “분향소가 생긴 이후로 유튜브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주변을 촬영하며 경찰에 시비를 거는 이들이 늘었다”며 “미신고 집회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다중운집으로 통제가 안 될까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반면 서울광장은 공적인 공간이지만, 시민을 위한 곳인 만큼 시민이 이용하도록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서울광장은 공공시설로 유족 측이 행정절차를 받지 않고 불법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면 서울시 내부 규정에 따라 점용료만 내면 될 일”이라며 “추모공간으로 서울광장 사용을 불가능하게 한다든지, 시민 불편을 일으키지 않는 한 굳이 계고장을 날리고 행정집행을 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참사를 기억하는 추모관을 만들어 모두를 위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태원이라는 공간만이 아니라 국민 누구나 이런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관리·책임자들이 이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로 국가적인 공간을 서울 중심부에 만들면 더 효과가 클 것”이라며 “이번엔 ‘기억의 공간’을 잘 마련해서 참사를 예방할 수 있는 사회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의학과 교수도 “사회적 참사는 개인적인 처방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고 사회적 대응 및 장례 과정이 중요하다”며 “9·11테러 이후 미국은 유족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길게 거쳤는데 우리도 충분히 숙의하고 민주적으로 치유하는 과정을 거치면 유족도 희망을 찾는데 도움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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