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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우리 운명의 지침을 바꿔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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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기자I 2019.02.28 05:00:00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소장]“그 일이 있고나서, 동백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주의자가 되었지요.”

한남권번의 기생이었던 금죽은 3·1 만세를 경험한 이후 변화한 자신의 삶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겨우 일곱 살의 나이에 기생학교에 입학했다. 열여덟 살에 서울로 와 제법 이름
있는 기생으로 살던 그가 3·1 만세를 경험한 것은 스물두 살이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금죽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정칠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평양 진명여학교의 교장이었던 조신성은 3·1 만세 이후 ‘강도’가 되었다.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월급을 운반 중이던 우체부를 습격하여 3000원을 빼앗은 것이다. 그는 이전까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교 운영에 골몰하던 교장선생님이었지만, 3·1 만세에 참여했다가 사직을 당한 후 더욱 치열하게 직접적인 행동에 나섰다. 청년들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했고, 다이너마이트 도화선, 권총, 인쇄기 등을 사들여 평안남도 맹산 선유봉의 한 동굴 속에 숨겨놓고 일본 관헌과 친일파에게 협박장을 보내고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는 등 무장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3·1 만세 당시 총독부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하고 있던 박자혜는 본래 덕수궁의 궁녀였다. 아홉 살에 입궁하여 10여 년간 궁인 생활을 하다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궁을 나와 간호부가 되었다. 만세 시위로 부상한 사람들이 그가 일하는 병원으로 실려 오자 그들을 치료하는 한편 자신도 만세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병원을 사직하고 중국 북경으로 떠나 회문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조화벽은 3·1 만세 당시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학생이었다. 호수돈에서 친구들과 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강제로 귀향시키자 어머니가 계신 강원도 양양으로 왔다. 버선목에는 독립선언문을 감춘 채 말이다. 일제 경찰의 검문에서 간신히 지킨 그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고향 청년들과 함께 몰래 인쇄하여 들고 4월 4일 양양 장날에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이후 학교를 세우고, 교사로 독립운동가로 살던 그는 독립운동가문의 기둥이 되어 간난의 세월을 강인하게 살아냈다. 유관순 열사가 그의 손아래 시누이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오고 고향에서 부모와 함께 살던 안경신은 3·1 만세가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1개월 구류를 살게 된다. 석방 된 후 그는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해서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예 상해로 망명하여 광복군총영에서 국내로 파견하는 결사대의 일원이 되어 다시 입국했다.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져 평양 시내를 들썩이게 하고, 평양시청과 경찰서에도 투척하였으나 도화선이 비에 젖어 불발에 그쳤다. 체포 당시 그는 임산부의 몸이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세 달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103만 명이 넘는다. 시위는 국내에서만 모두 1593건, 국외에서는 99건이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911년에는 1100만 명, 1925년에는 1900만 명이었다는 총독부 자료를 바탕으로 어림잡아 볼 때, 집집마다 모두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꾼 대 사건이었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왕의 백성도 아니고, 제국의 신민도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거듭나는 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3·1 운동은 거기에 참여했던 수많은 개인들의 운명도 바꿔놓았다.

그가 기생이었든 간호부였든 학생이었든 교장이었든 간에 그들은 자기 운명의 주체로, 민주공화국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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