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펜트하우스'의 리얼리즘

안승찬 기자I 2021.03.11 06:00:00

내부 정보 이용 땅투기, 금수저 부모의 입시비리
막장드라마 욕할 것 없어..현실이 더 막장이니
바뀌지 않는 세상, 가상세계서 카타르시스만 추구
비상식적 사회 변해야 막장에 대한 열광 사라질 것

[정덕현 문화평론가] 최근 방영되고 있는 김순옥 작가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시즌1을 28.8%(닐슨 코리아)라는 놀라운 시청률로 끝을 맺었다. 새로 시작한 시즌2도 매회 시청률을 경신하며 6회 만에 26.9%를 기록하고 있다. 사실 시청률이 그 드라마의 완성도나 성공의 지표가 되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지만, 이 작품에는 의외로 호평까지 이어진다.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자극적인 ‘마라맛’ 드라마라는 것. 한 때는 ‘막장’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하던 시청자들이, 이제 ‘마라맛’이라는 색다른 표현을 사용해가며 호평을 내놓고 있는 풍경은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만든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

<아내의 유혹>부터 김순옥 작가가 써온 일련의 작품들이 ‘막장’이라 불리게 됐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 하나는 다루는 내용이나 소재가 비윤리적이거나 선정적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가족 복수극’이라는 점은, 부부나 부모자식 간에도 벌어지는 처절한 복수의 ‘패륜적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판에 대해 항간에는 고대 그리스 비극 또한 그런 내용과 소재들을 담고 있다는 걸 들어가며 ‘표현의 자유’를 강변하기도 했다. 이런 반박은 사실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면이 있다. 불륜 같은 소재를 다룬다고 해도 어떤 작품은 명작이라 불리고 어떤 작품은 막장이라 불리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막장이라 불리게 되는 또 다른 요인이 중요해졌다. 그건 ‘완성도’의 문제였다. 제 아무리 불륜, 나아가 패륜을 소재로 해도 작품이라도 담고 있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그걸 드러내는 완성도가 있다면 막장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김순옥 작가의 작품들은 이 부분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 이것이 사전에 정의된 ‘개연성’의 의미다. 즉 드라마는 허구지만 아마도 그럴 수 있을 법한 방식으로 그려지길 요구된다는 이야기다. <펜트하우스>는 ‘집값 1번지, 교육 1번지에서 벌이는 서스펜스 복수극’이라는 작품의 개요에도 나와 있듯이, 부동산과 사교육이라는 현 대중들이 현실에서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소재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와는 상반되게 드라마의 내용은 그다지 개연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개연성 부족을 비판하는 목소리보다 ‘개연성을 포기하라’는 목소리가 커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드라마에 무슨 개연성을 바라냐며 개연성을 포기하면 ‘확실한 재미’가 보장된다고 혹자들은 말한다. 개연성 부족과 재미는 썩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펜트하우스>는 그렇지 않다. 개연성을 포기하는 대신 작가는 시청자들이 현실에서는 결코 얻기 힘든 카타르시스 복수를 원하는 대로 만끽하게 해준다. 개연성 포기가 작가의 ‘신적 개입’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것이 시청자들이 원하는 갈증과 욕망을 풀어주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것.

이런 기묘한 ‘관전 포인트’가 생겨난 이유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개연성 없이 굴러가는 현실이 보인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한 이들이 좋은 대학에 갈 것이라는 ‘개연성’은 깨진 지 오래다. 그보다는 어떤 부모를 만나고 그 부와 줄을 통해 얻는 정보력 같은 것이 대학 입학에 관건이 된 현실이 아닌가.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해 촘촘히 엮어진 카르텔로 거주자를 몰아낸 후 재개발해 막대한 이익을 내는 부동산 재벌들이 존재하고, 심지어 이런 이들을 단속해야할 관계자들이 사전에 얻은 정보로 땅을 대거 매입해 투기에 앞장서는 ‘개연성 없는’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연일 터지고 있다. 죄를 지은 자들이 응당 벌을 받지 않는 사법체계는 ‘법에 대한 개연성’을 무너뜨리고,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정치인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정치권력을 활용하는 정치체계는 ‘정치에 대한 개연성’을 무너뜨린다. 진실을 알려줘야 할 언론이 정치적 입장에 따른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기레기’라는 감정이 잔뜩 들어간 표현 속에는 신뢰가 땅에 떨어져 더 이상 ‘개연성 있는 언론’을 찾기가 힘들어진 현실이 담겨 있다. 이러한 ‘개연성 없는 현실’은 우리에게 냉소적인 얼굴로 속삭인다. 개연성을 뭘 기대해. 경제, 교육, 사법, 정치, 언론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그래서 <펜트하우스>의 개연성 포기는 저 개연성 없는 현실을 오히려 잘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다른 건, 현실에는 가진 자들이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떵떵 거리며 사는 결과를 보여주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들이 결국 처절하게 응징되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현실은 응당 그래야할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없고, 드라마는 그런 현실 때문에 결코 벌어지지 않을 응징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없다.

보통 현실과 드라마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말한다. 즉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드라마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펜트하우스>의 경우, 현실의 부동산, 교육 문제를 이 드라마는 자극적인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혹자는 그저 재미로 보는 드라마에 무슨 영향력이 있겠는가 말하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부동산이나 교육 문제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현안들을 가져와, ‘개연성 없는 방식’으로 당장의 카타르시스만을 보여주는 건 그 자체로 현안을 너무 가볍게 보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정적인 건, 그런 현안 자체에 대한 개혁의 의지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점이다. 결국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개연성 없는 가짜 카타르시스라도 즐기자는 지독히 씁쓸한 ‘현실 포기 선언’이 그 안에는 담겨 있다. 물론 드라마 같은 작품이 현실을 당장 바꿀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적어도 그럴 듯한 상상을 통해서나마 바람직한 현실을 꿈꾸게 하는 건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네 현실이 응당 굴러가야 하는 방식으로 굴러가는 ‘개연성’을 갖는 일이 우선일 게다. 얼마나 세상이 비상식적으로 움직이면, 드라마 속에서라도 개연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잠시나마 상식이 세워지는 모습에 이토록 열광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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