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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카더라’ 쯤으로 치부하던 그 설마, 설마 하던 일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블랙 프라이데이’에 일어났다. 하루 만에 터키화는 14% 떨어진 1달러당 6.46리라, 주말을 지나 월요일엔 7.01리라를 찍더니 6.9리라로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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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그랜드 바자르 사설 환전소는 난데없는 성황을 맞았다. 1000달러, 2000달러를 손에 쥔 소액 투자자들이, 오르내리는 환율에 맞춰 달러를 사고팔며 환치기에 여념이 없었고, 주말 내내 샤넬, 루이뷔통, 버버리 등 명품 숍엔 관광객들이 달러·리라 환율 인하로 저렴해진 명품 구입을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다. 대부분 중동과 유럽,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관광객들이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30분 이상 줄을 서 매장에 들어가는 모습은 현지인들에겐 낯선 풍경이다. 한국 포털사이트엔 하루 종일 ‘터키 버버리’가 상위 검색어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런던 본사에서 운영하는 버버리 터키 온라인 쇼핑 홈페이지에는 리라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어 달러·리라 환율 인하로 그만큼의 할인 혜택을 볼 수 있다. 배송지는 터키. 정상 가격의 반의 반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 해외 직구(직접구매) 대행자는 물론, 터키 현지 배송대행지를 찾는 문의가 터키 한인 사이트에 넘쳐났다. 심지어 터키 여행을 위한 항공권 문의도 쇄도했다고 한다.
여행자들에게 지금 터키는 세계에서 쇼핑하기 가장 좋은 나라, 생활물가 저렴한 나라가 돼 있다. 500㎖ 생수 한 통에 1리라(약 200원), 어른 머리 크기의 15kg 수박이 15리라(약 3000원)밖에 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행객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약삭빠른 어떤 이는 지금이 터키 리라화 투자 찬스라며 한국에 살면서도 은행을 찾아 외환계좌를 트고 수백만 원으로 1터키리라를 163원에 구입해 해외 계좌에 예금해뒀다고 무용담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간 터키로 여행을 가려는데 투자 겸 준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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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화 가치 폭락은 터키에서 달러나 유로로 수익을 올리는 이에게는 쉽게 돈을 버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자, 돈 있는 사람들에겐 반값이 된 부동산을 사들일 흔치 않은 기회가 되고 있다. 반면, 터키 리라로 월급 받고 생활해야 하는 터키 현지인에게는 멀쩡히 앉아서 도둑질을 당하는 상실감을 맛보게 했다.
터키 리라로 월급을 받는 고교 지리 교사 딜렉은 10년째 팔순 노모를 돌봐주고 살림을 맡아 하는 입주 도우미에게 달러로 주는 월급이 이미 자신의 한 달 수입을 웃돌아 울상 짓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터키 리라가 하강 곡선을 그리더니 올해 들어서는 월급만으로는 도우미의 월급이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입주 도우미의 휴가 날짜를 더 늘려야줘야 했다.
벼르고 별러 열흘 전 계약한 자동차를 찾으러 갔더니, 계약서에 적힌 가격보다 우리 돈으로 200만 원가량이 더 올랐으니 차액을 내라고 해, 결사적으로 항의해 겨우 원래 가격으로 자동차 키를 받아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온라인 쇼핑의 가격은 몇 시간 간격으로 바뀌고 있다.
섬유를 재가공해 수출하는 터키의 한 업체 사장은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해 쓰고 있는데 리라화 가치 폭락으로 앞날이 막막한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열흘 전에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산 한 교민은,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자마자 30% 가까이 손해를 봤으니 이걸 언제 회복하느냐며 망연자실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한국에서라도 돈을 끌어와 터키 부동산을 살 기회일까? 현재로선 흔쾌히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터키는 외국인 명의로 부동산을 살 수 있지만, 터키 경제는 외자를 유치해 건설에 투자하는 전시행정에 몰두하고 정경 유착, 규모를 알 수 없는 지하 경제가 횡행하는, 건강하지 않은 경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터키의 경제 위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돼왔다.
요 며칠 사이 2년 만기 터키 국채의 이율은 26%를 넘었다. 투자가 아닌 투기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터키 중앙은행은 보유 외화를 풀고, 통화 안정을 위해 금리를 올리고, 해외 투자 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의 대책이 발표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쉬워 보이지 않는다. 14일 오후 들어 리라화는 터키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로 소폭이나마 반등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터키 가란티 뱅크(Garanti Bank)의 제너럴 매니저 알리 푸아트 에르빌(Ali Fuat Erbil)은 “아직 불이 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조심스레 관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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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2년 전 그리스의 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처럼 현금을 집단적으로 대량 인출(뱅크런)하거나 현금인출기에 현금이 동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다수 터키인들은 다음 주 이슬람 최대 명절인 희생절(쿠르반 바이람·21~24일) 이후를 걱정하고 있다. 연휴가 지나고 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가 아닌 ‘작년이 더 좋았어’라고 말하는 터키인 이웃들과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