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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용광로”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중국이라는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아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가 될 준비가 된 액체로 변해 버린다. 사람도 녹고 문화도 녹고 역사도 녹아 버린다. 경제는 말할 것도 없다. 녹아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중국이다.
1997년 봄. 4년간의 중국 사업은 실패 연속이었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는 중국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했다. 가족까지 모두 중국에 온 상황에서 다른 길이 없었다. 남아 있는 돈을 까먹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먹는 장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인들도 대부분 먹는 장사를 권했다. 베이징에 ‘떼거지’로 몰려드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일단 먹는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당시 중국도 맥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급중하는 추세였다.
마침 베이징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있는 중국 식당 주인을 알게 됐다. 베이징에 온 외국인들의 왕래도 잦은 곳 2층 건물의 2층 전체 130여 평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임대할 수 있었다. 낮에는 경양식 레스토랑, 저녁엔 레스토랑과 한국식 호프집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프렌차이즈 사업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브랜드를 그대로 들여왔다. 일단은 한국인을 상대로 시작하자. 그리고 잘사는 중국인들, 외국인들이 와 음식과 술, 그리고 한국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현지화 한다는 전략이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무척 많았다. 한국인 주방장에 조선동포 직원들 인선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호프집 근처에 조선동포들의 기숙사까지 마련했다. 당시 조선동포를 직원으로 채용하려면 기숙사는 필수였다. 베이징에 온 조선동포들의 생활은 너무나 열악했다. 무엇보다도 잠잘 곳이 없어 애를 먹었다. 그들이 베이징까지 온 과정을 보자. 조선동포들은 중국의 동북쪽에 위치한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이른바 동북 3성에 주로 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 동쪽 지역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인들은 무리지어 중국에 왔다. 이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만주는 우리 땅”이라며 만주 벌판을 헤집고 다녔다. 여행 가이드, 통역, 운전 등은 자연스레 조선동포 몫이었다. 중국에 온 한국인들을 본 조선동포들은 한국인들의 ‘돈 씀씀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혔다. 5000원짜리 식사를 하고 팁은 1만원을 건넨다. 중국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 값이 3만원이 나왔는데 조선동포 여종업원 손 한번 만져보고는 100 달러를 턱하니 주고 간다.
동북 3성에 사는 젊은 조선동포들의 마음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들의 혼을 빼놓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인을 만나기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 가야했다. 이 때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호구(戶口)다.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이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쉽게 호구를 바꿀 수가 없다. 베이징 사람, 즉 베이징 호구가 있는 사람이라야 베이징에서 취직을 할 수 있고 주택, 물품 등 배급을 받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마음대로 호구를 바꿀 수가 없다.
원칙이 있으면 예외가 있게 마련. 돈이면 호구도 살 수 있다. 1997년 당시 길림성 출신 조선동포가 베이징 호구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 돈 500만 원 정도가 있어야 했다. 이런 거금을 내고 북경 호구를 받을 수 있는 조선동포는 거의 없다. 그러니 일가 친척, 고향 선후배 등 지인들의 집에서 일시적으로 묵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조선동포끼리 모여 자취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가 문제다. 사람이 살면 소문이 날 수 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호구가 없는 사람들이 산다고 신고만 들어오면 바로 단속이 나와 고향으로 쫓겨 가야한다. 단속도 단속이지만 고향에 쫓겨 가서도 벌금을 내야하는 등 적지 않은 고통을 감수해야한다. 그러니 직원으로 채용하려면 기숙사를 만들어 줄 수밖에 없다. 잘 근무하고 있다가 단속만 나오면 갑자기 사라지는 조선동포 직원들을 찾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잠자리를 만들어 줄 수밖에 없다. 기숙사까지 준비되자 호프집 개업 준비가 거의 끝난 셈이다.
<다음회 계속>
중국 전문가, 전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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